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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Aug 31. 2024

엎어진 김에 일상 여행

같이 걸을래?

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집에 우환 있는 여자라는 타이틀은 싫었지만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하거나, 잦은 연가의 사용이나, 문득 한 번씩 시무룩해져 있는 표정으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남편이 아프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래도 일상의 많은 것들을 공유하던 지인들에게는 그런 거에 상관없이 내가 처한 상황을 털어놨다.)

    

사람들은 엄마도 아픈데 남편까지 그러니 내가 고생이 많다면서 나를 걱정해 주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말 끝에 금방 좋아질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좋은 마음으로 한 말인 줄 알면서도 가볍게 느껴지는 위로는 오히려 나의 마음을 휑하게 만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과 위로를 받고 있으니 나는 불행한 거겠지?


                  




   언제 두통이 올지 몰라 운신의 폭이 좁아진 남편에게 맞춰 우리는 아파트 단지를 주로 산책한다. 나는 조금 더 반경을 넓혀 단지 밖 공원길이나 가까운 카페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지만 남편은 머리가 아플까 봐 겁이 나서 단지 밖으로 나가는 걸 꺼려한다. 그저 800세대 남짓의 그리 넓지 않은 아파트 단지 안을 열심히 돈다.   

  

남편이 아프기 전의 우리는 이렇게 같이 산책을 잘 하지 않았다. 남편은 자기의 루틴에 맞춰 땀을 뚝뚝 흘리면서 운동은 해도 나가서 걷는 건 싫어했었다. 나는 평일 퇴근 후나 주말에 노견 다솜이의 노즈워킹을 위해서라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꾸역꾸역 나가서 걷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도 대부분 단호히 거절당했다. 한 번씩 몸이 무거운 날에는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 더 힘이 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막상 혼자 나가면 그런대로 좋았다. 조용히 사색을 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다솜이가 걷고 싶어 하는 만큼 걷게 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이 가끔 함께 가면 양껏 걷게 해 줄 수가 없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에는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다솜이와 인적이 드문 벤치에 한참을 앉아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실컷 느꼈다.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인 듯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남편아픈 후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격한 운동을 할 수 없다. (시술을 통해 막혔다는 가정 하에)척수관이 다시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립성 두통때문에 운동은커녕 하루종일 앉아있는 것만도 힘들다.


지금 남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에 가까운 행위는 걷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이 먼저 산책이나 맨발 걷기를 가자고 한다.   

  

'좋지. 이런 날이 다 오네.'      


같이 걸으면서 마음이 종잇장처럼 얇아져 자주 눈물을 보이는 남편의 손을 잡아 준다. 스물여섯 살에 같이 부모가 된 우리는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때도 있었다가, 그래도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름대로 치열하게 달려왔고, 차츰 안정된 생활을 이루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애증과 전우애가 적절하게 혼합된 사이인 것이다. 그런 우리가 목적 없이 나란히 걷는 것도 오랜만인데, 다정하게 손까지 잡다니….    


      




   우리는 단지 안을 돌면서 어쩔 수 없이 매일 같은 풍경을 본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매일 보던 풍경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계절로 구분 짓자면 봄에 들어가는 시기임에도 3월 초까지 소나무과(科) 나무들을 빼고는 다 죽어있는 것 같고 생명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지난겨울에 눈이 유난히 많이도 오더니 다 얼어 죽은 건 아닐까?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에 매섭게 찬 기운이 사라지니 제일 먼저 산수유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우리의 겨울 같은 날들도 끝날 거란 희망이 느껴져서일까? 무채색 속에 피어난 천진난만한 노랑이 여느 때보다 반가웠다. 그를 시작으로 아이보리빛 우아한 목련, 투명한 질감의 청초한 진달래, 온 세상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였다가는 꽃비를 흩뿌리고 가버리는 벚꽃, 엄마 친구 이름 같은 명자나무, 그리고 라일락…. 다른 형용이 필요 없이 그저 ‘라일락 향기’로 설명되는 연보랏빛 봄내음.


그야말로 봄꽃의 향연이 작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펼쳐졌다. 저마다 자기 순서에 피고 영원할 듯 아름다웠다가도 이내 다음 해를 기약하면서 지는 모습이 겸허하다.



누가 심어준 것도 돌보아준 것도 아닌데 보도블록 틈에서까지 움튼 제비꽃과 민들레에게는 “너희들 대단하다, 정말!”이라는 말로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자연 속 식물들은 자기의 생명을 참 기특하게 살아낸다. 바람, 햇볕, 비. 주어진 것만으로 묵묵히 꽃을 피워낸 생명력을 보면서 가장 강인한 힘은 오히려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많은 때에 불만족과 억울한 감정에 메여서 지금의 나를 꽃피우지 못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던가?





 

   나에게 이런 잠기는 시간이 없었다면 올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봄이었겠지? 계절의 변화와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은 한참 더 나이를 먹어야 얻었을지도 모른다.


일상에 갇혀 지내며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맑은 공기나 푸른 하늘같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으니 내가 지금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건 맞지만 꼭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일상을 여행하고 있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남편과 나란히 걸으면서 나름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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