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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Sep 14. 2024

의도치 않은 관계의 변화와 글쓰기

에세이 입문기

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남편이 아프게 된 후로 나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 회사 가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집에만 있기 때문이다. 처음 모임들이 끊겼을 때는 많이 답답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상황에서 딱히 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가면 뭐 하나? 집에서 혼자 슬퍼하고 있을 남편 생각에 즐기지도 못하고 죄책감이 들 것이다.


나는 술이 안 받는 체질이라서 맥주 한 잔도 채 못 마시면서도 그런 치고는 술자리를 즐겼다. 누군가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면 여러 명의 스케줄을 물어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정산을 하고, 내 차로 안전 귀가까지 책임지는 상급 ‘술총무’였다. 모임 구성원이 나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사인가 싶겠지만 전혀 아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난 배려심이 많았을 뿐이다.     


 얘기는 꿀꺽 삼키고 남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짠’ 하느라 마신 사이다 때문에 속은 부글부글하고, 시간이 늦어지면 연신 나오는 하품을 참아가며 자리를 지켰다. 그뿐인가? 가끔 노래방까지 가게 되면 '백만 송이 장미'와 '땡벌'을 최소 열 번씩은 들었다.  모든 것을 맨 정신으로. 


처음 한두 번 그렇게 하니 계속 기대하는 마음들이 크게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고, 나도 즐거웠다. 술 안 마시는 사람이 술자리 좋아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만큼 나는 사람을 좋아했던 것이다. 고로, 내 만족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임과 몇 걸음 떨어져 지내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요즘 나는 더 재밌는 걸 알아버렸다.





 


   나의 일신상의 문제(남편의 투병)는 자연스럽게 사교모임(?)에 변화를 가져왔다. 요즘에는 회사의 공식적인 회식 빼고는 술이 없는 모임만 가끔 한 번씩 한다. 퇴근 후에 만나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식당에저녁을 먹고, 2차로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가 맨 정신이라 피곤도 함께 느끼니 9시 전후로 누군가는 말을 꺼낸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낯선 사람이 부담스럽고, 낯선 사람이 무리로 있으면 무섭기까지 한 내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지난 4월 독서 모임의 뉴페이스로 자진해서 들어갔다. 몇 년째 이어져온 직장 내 학습동아리였다. 볼거리가 많다는 핑계로 요즘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여기에 들어가면 억지로라도 한두 권은 읽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더니 올해 주제는 '읽기'만이 아니라 '쓰기'까지라고 한다. 다음 모임까지 '여행'을 소재로 에세이를 써 가야 했다. 글쓰기라고는 공시 면접 때 쓴 자소 이후로는 국민신문고 답변이 전부인데, 에세이를 쓰라고?


국민신문고 답변이라면 나름 자신이 있었다. 민원 업무를 담당했던 몇 년간 내 답변은 종종 민원인들의 '매우만족'을 이끌어냈다. 때로는 원하는 걸 들어주지 못하는데도 좋은 만족도평가를 받기도 해서 어리둥절했지만 기관에서는 잘했다며 온누리상품권이나 들기름 같은 지역특산품(3만 원이 절대 넘지 않는)을 주고는 했다.


나의 글은 당연히 문학적인 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들이 수행평가로 쓴 글에서 비문을 고쳐준답시고 손을 대면 영락없는 무색무취 공문서 느낌의 글이 돼버려서 “그냥 네가 썼던 게 낫다” 하고 손을 뗐다.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여행도 못 다니고 있는데 하필 주제가 여행이어서 도대체 무슨 말로 시작해야 좋을지. 막막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 설레는 건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던가. 읽었던 에세이 중에 좋았던 것을 떠올려 비슷한 느낌으로 써보자 싶었다. 이런저런 에세이집을 꽤 읽었는데도 왜 교과서에서 봤던 '방망이 깎는 노인'과 '신록예찬'만 떠오르는지? 주입식 교육이 대단한 건지, 작품이 대단한 건지, 둘 다인 건지.


한 달 후인 다음번 모임까지만 쓰면 되는데도 설렘인지 스트레스인지 모를 마음으로 그날 바로 침대에 누워 휴대폰 메모장에 글을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쓴 첫 에세이가 지난 회차인 '엎어진 김에 일상여행'이었고, 사실 처음 제목은 '정신승리'였다.


그런데 지금 내 상황의 영향인지, 한밤중에 써서인지 다음 날 읽으니 무겁고 진지하게 느껴졌다. 나는 유쾌한, 아니 조금 더 솔직히 표현해 '웃기는' 글을 좋아하는데, 그런 글을 쓰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그나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말랑말랑하고 산뜻한 글을 목표로 다시 써서 냈다.






   독서 모임을 하고 돌아온 날 남편이 내가 쓴 글을 읽고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었다.   


 “재밌는데? 잘 읽혀. 너 그거 해봐. 아, 그거 이름 뭐더라?”     


다독가는 아닌 내게 잘 읽히는 책은 좋은 책이고, 한 번씩 웃음 포인트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었다. 피식 웃으면서 잘 읽힌다고 하는 남편의 칭찬은 내 기준 최고의 표현이었다.


그때 남편이 알려준 것이 ‘브런치스토리’였다. 그렇게 올해 6월 브런치 마을에 들어오게 됐다.


 '어머! 나만 글 안 쓰고 산 거야?'


사유의 폭이 넓고, 소재도 다양하고, 필력도 대단한 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특히 읽으면서 계속 웃음이 나는 글은 나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주눅도 좀 들었지만.


그래도 “재밌어. 잘 썼어.” 하면서 추켜세워주는 나의 1번 구독자 남편을 믿고 오늘도 이렇게 끼적여 본다. 마침 환자 가족으로서 활동에 제한이 있는 나는 시간이 많지 않은가?


사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써본다는 핑계는 부족한 내 글에 대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요즘 글 쓰는 시간에 마음이 꽉 찬 기분이 든다. 뭐라도 하나 써보겠다고 집중하는 시간 동안 쓸데없는 생각들이 사라져서 좋다.




        


   누군가 모든 경험은 좋건 나쁘건 남는 건 있다고 다. 살면서 그 말옳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많았다. 지금의 시간 또한 그렇다. 남편의 투병으로 인해 생긴 생활 속 제한들은 오히려 나의 라이프스타일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 같으니 말이다.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나에 대해 알아가고,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아가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느꼈다. 잘 쓰건 못 쓰건, 반응이 뜨겁건 미미하건 크게 상관없다. 단 한 명이라도 나의 글을 읽고 잔잔한 울림이 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그 한 명이 나여도 괜찮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도 성실하게 자기만의 글을 쓰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모든 작가님들과 또 시간 들여 남의 글을 정성껏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을 응원하고, 존경하고, 각자의 우주가 나날이 더 풍요로워지기 바라본다.


남편이 진짜로 완치된다면 나는 다시 여행도 다니고, 자유롭게 약속도 잡을 것이다. 매일 뻐근하고 저린 왼쪽 어깨 때문에 생존운동도 시급하다. 그렇지만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이 많아진다 해도 이제 읽고 쓰는 재미를 버리진 못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다시 한번 솔직히 말하면 장담은 못하겠다. 드라마나 소설을 써보라며 '제2의 장항준'을 꿈꾸는 허무맹랑 팔불출 남편이 십수 년만에 공용 아닌 나만의 글쓰기용 노트북도 선물해 줬지만 은근히 싫증을 잘 내는 나란 인간. 믿지 마시게. 그래서 종결어미가 의문형인 것이다. 


남편이 완치된 어느 날, 나는 '글쓰기는 역시 국민신문고가 제맛이지!' 하면서 브런치마을에 발길을 끊고, 액상과당 잔뜩 든 탄산음료로 '짠'을 하고, 노래방에서 무한히 피어나서 천만 송이가 된 장미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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