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 두개 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CSF leak) : 뇌척수액이 흐르는 통로인 경막의 파열로 뇌척수액이 누출되어 뇌압이 낮아져 기립성 두통을 주로 하여 어지럼증, 구토, 복시, 눈부심, 이명 등 다양한 신경증상이 생기는 질환
부부는 한 몸이라더니 남편의 일상이 멈추면서 나에게도 많은 제한이 생겼다. 가장 크게 느낀 답답함은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것과 생활반경이 좁아진 것이었다. 나에게도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모임들이 있었고,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남이 생기는 날도 종종 있었다. 내향인에 ‘술알못’인 데다가 이른 나이부터 엄마 노릇 하느라 음주문화를 몰랐던 내가 뒤늦게 맛을 본 사람들과의 친목 도모는 아주 달콤했다. 그러다 자유롭게 약속을 잡을 수 없으니 달달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다가 바닥에 떨군 아이처럼 무언가 뺏긴 기분이 들었다.
평소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던 여행도 괜히 더 가고 싶었다. 모임이 끊긴 내가 유일하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인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펼쳐지는 수다 타임에 누가 여행으로 어딜 다녀왔네 하는 얘기를 들으면 내 처지가 괜히 더 서글퍼지기도 했다. 막상 가라고 하면 또 번거롭고 귀찮아할 거면서 남들과 비교하며 못 움직이는 내 상황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사람 마음이란 참...
말이 나온 김에 마지막으로 여행 다녀온 게 언제였나 헤아려 보니, 재작년 9월 엄마 보러 혼자 일본 다녀온 게 끝이다. 그마저도 간경화 합병증으로 식도정맥류가 터져 수술받은 엄마를 보러 간 것이었으니 즐거운 여행의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엄마 보러 일본만 수십 번을 다녔지, 동남아도 유럽도 여태 가보지 못했다. 여행이란 마음 먹으면 가면 그만인 것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부지런히 다녀둘 걸 그랬다 싶다. 그래서 남편이 다 나으면 우리 가족(남편, 나, 아들)은 유럽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남편이 앓고 있는 '뇌척수액 누출' 질환의 국내 (거의) 유일한 치료 방법은 '블러드 패치'라는 시술이다. 나는 이 시술명을 듣고 마치 무슨 RPG 게임의 아이템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피로 뭘 하지? 뭔가 과학적이라기보단 주술적인 느낌인데?’
이 시술은 우리말로는 '자가혈액 첩포술'이라고 하며, 환자 본인의 피를 뽑아서 경막 외에 주입해 혈액의 응고로 누출 부위가 막히기를 '기대'해보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해 피로 빵꾸를 떼우는 것이다.) 남편은 일 년간 총 네 번의 블러드 패치를 했지만 번번이 기대가 무너졌다. 성공률이 별로 높지 않은 이 시술은 (게임 얘기가 나온 김에) 아이템으로 치면 ‘저 티어’나 ‘바텀 티어’라 할 수 있고, 나의 느낌처럼 어느 정도는 주술적인 면도 있다. 성공을 간절히 빌어야 하니까.
대학병원 마취통증과에서 하는 시술은 매번 사람을 잡았다. 첫 시술 땐 혈액을 주입하다 카테터 연결부위가 터져서 피칠갑을 하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결국 채혈부터 동일한 과정을 반복해야 했고, 두 번째 시술받던 날에는 타깃 지점을 못 잡아서 고생을 했다.
전임의: (바늘을 찌른 후)"췍 부탁뜸다(체크 부탁드립니다)."
교수:(엑스레이를 확인하며)"본(뼈에 닿았다는 의미)"
전임의: (다시 찌른 후) "췍 부탁뜸다."
교수: "본"
남편은 1시간 동안 저놈의 "췍 부탁뜸다."와 "본" 소리를 수십 번은 들었다고 한다. 전임의 선생님도 식은땀이 났겠지만 힘든 자세를 취한 채로 등에 바늘이 계속 꽂히는 고통은 고스란히 남편의 몫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유일한 치료 방법이니.
그마저도 올해 초부터 시작된 의료파업 때문에 다니던 대학병원에서는 시술을 받을 수조차 없게 됐다. 남편과 나는 평소에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이라 할지, 존경이라 할지, 아무튼 우리가 믿는 신 다음으로 높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났던 모든 의사가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캐릭터 같지는 않았지만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사명감으로 힘든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끔씩 마주했던 권위적인 태도도 묵묵히 수긍했다. 그런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행히도 담당 교수님은 자리를 지켜주셨고 시술을 위해 인근 '○○○마취통증과'로 회송서를 써주셨다. 그래서 세 번째와 네 번째 블러드 패치는 이 병원에서 받게 되었다. ‘나 호인이오.’ 하고 얼굴에 쓰여있던 ○○○ 교수님은 그곳에서의 첫 시술 때 호언장담을 하셨다.
"나한테 받고, 두 번 온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경험 많은 의사에게 시술받을 수 있게 돼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말했듯이 이 병원에서 두 번의 시술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두 번째 방문의 첫 사례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런 걸로 치자. (* 척추마취 등으로 생긴 바늘구멍이 막히지 않아 발병한 뇌척수액 누출의 경우 이 시술의 효과가 거의 100%에 가깝기는 하다. 그러니 그런 환자들만 방문했었다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철문으로 굳게 닫힌 대학병원의 처치실과는 달리 규모가 작은 개인병원은 기다리는 동안 남편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아아... 아아... 아아아아아악!! 아파요!!!!"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남편의 비명에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이 시술의 잔인함은 마취 없이 맨정신에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신경이 많이 지나가는 곳이라서 자칫 있을 부작용을 대비해 환자의 반응을 살피면서 피를 주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엄살인가 싶었는데, 남편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고통을 호소했고, 초조해하는 내게 간호사들은 오며 가며 눈짓으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대학병원이 나았다.
남편의 고통에 나는 마음이 아프니 역시 부부는 한 몸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고통을 나눠 가질 수는 없음에 우린 또 한 몸은 아니었다. 남편이 아픈 동안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 세 시간 정도는 내가 아플게."라든지, "통증강도 5 중에 2 정도는 내가 가져올게." 하면서 고통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우리는 한 몸이라 불려도 철저히 다른 개체일 뿐임을 실감한다.
시술이 끝나고 남편의 표현을 듣자 하니 피가 들어갈 때 가슴팍을 트럭이 밟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결국 목표치의 절반 남짓의 혈액만 넣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그래도 이번엔 꼭 막혔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또 기대했지만 이후 실시한 MRI검사 결과상에는 여전히 척수액이 샌 흔적이 보였다. 언제까지 기대에 의존해야 할지 답답했다.
고통 후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실망이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이면서 남편에게서는 어느 순간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예 사라졌다.
"내가 죽어야 끝나나 봐."
같은 '뇌척수액 누출' 환우 중에는 달에 한 번씩 지금까지 50번 정도의 블러드 패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 분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네 번을 끝으로 더 이상 의미 없는 블러드 패치를 받지 않기로 했다. 기대에 의존하는 거 말고 확실한 것이 필요하다. 아프기만 하고 효과 없는 블러드 패치 말고 수술을 받을 수는 없을까?
알아보니 미국과 독일, 일본은 수술이 가능했다. 그런데 미국은 비용이 최소 5억이라서 탈락이다. 일본은 수술이 그리 활발하지는 않은 듯했다. 마찬가지로 탈락. 남은 곳은 독일이었다. 마침 유럽이네? 독일 프라이브루크에 있는 대학병원은 이 병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는데, 두세 번의 블러드 패치 후 효과가 없으면 바로 수술을 진행하고, 성공률은 96% 정도라고 한다. '탑 티어'가 독일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