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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Jul 28. 2024

의사도 잘 모르는 병

치명적인 '불확실성'



  

   2019년 말 '코로나19'라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는 등장과 함께 전 세계를 불안하게 했다. 지금은 대부분 한 번 이상씩 걸린 계절성 전염병으로 취급되지만 당시 우리 기관에 편성 상황반에서는 관내에 코로나 환자가 하나둘씩 나올 때마다 기관 전체가 호들갑을 떨었고, 대구에서 그 숫자가 네 자릿수가 됐을 땐 세상이 곧 끝날 것처럼 나라 전체가 들썩였던 기억이 난다.      


모든 무지는 일정 부분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그 대상이 바이러스나 질병처럼 해로운 것일 경우 그 두려움은 압도적인 듯하. 남편의 병은 초창기의 '코로나19'처럼 많은 것이 불확실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염성이 없고 10만 명 중 4~5명 꼴로 유병률이 낮은 이라서 연구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발성 두개내 저압증'은 접근법부터 치료방법까지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짐과 동시에 남편은 일단 출근을 할 수 없게 됐다. 겨우 마음 붙이고 즐겁게 다니던 기관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 속상함에, 본의 아니게 업무 공백을 만들어 생긴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혹은 불편함이 더해졌다.


기립성 두통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했던 남편은 후다닥 먹어치운다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식사만 겨우 하고 바로 또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오래 눕는 건 디스크 때문에 가뜩이나 아픈 허리에 더욱 무리를 주니 병이 병을 부른다는 말이 실감됐다. 원래도 가늘었지만 더욱 가늘어진 남편의 다리를 보면 나는 '고라니'가 연상됐고, 같이 지내던 친정엄마는 눈물을 보이며 마음 아파했다.


운동하고, 외식하고, 여행을 가고, 카페에 가는 일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누렸던 일상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몸의 병은 마음의 병도 깊어지게 한다.


모로 누울 수도 없고 천장을 향해 반듯이 누워야만 하는 남편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폰지작(휴대폰+만지작)'인데, 주로 '뇌척수액 누출' 관련 논문을 찾아보거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위로를 주고받는다.  (환우들끼리는 서로 응원하다 누군가 완치되면 말로는 축하하지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묘한 관계다.)


나라면 병은 의사에게 맡기고 이 기회에 전자책을 실컷 보거나 OTT로 영화나 각종 시리즈를 섭렵했을 것 같다. 그러나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동시에 염려가 많은 남편은 미지의 세계인 자기 질환에 대해 열심히 파고든다. 역시 우리는 많이 다르다. 부정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하는 남편과 그에 비해 낙관적이고 태평한 나. 우리는 종종 서로가 (다른 의미에서) 답답하다.





   자가진단을 마친 남편은 집 근처 2차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아무런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자발성 두개내 저압증'에 대해 제일 잘 안다는 교수님을 찾아 혜화동에 있는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잡았다. 초진 치고는 비교적 빠른 날짜에 예약이 잡혔지만 그래도 당연히 며칠의 대기는 있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무슨 일이든 빨리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은 며칠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처음 갔던 2차 종합병원으로 다시 갔다. 이번엔 신경과로 가서 진료를 봤지만 모르기는 마찬가지였고, 남편이 추측한 병명을 얘기하자, "아, 그런 걸 수도 있겠네요."라고 대답한 게 다였다.

 

꽤 큰 병원의 신경과 교수님조차도 이 병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가끔 환자가 아는 체하면 권위에 도전받은 것처럼 불쾌해하는 분들도 봐 와서 조마조마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의사도 모르는 병이라니...? 외모가 마음에 안 들면 성형도 쉽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최고의 의료시스템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의사들이 잘 모르는 영역이 있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의 자가진단이 100% 맞다고 할 순 없으니 나는 이때까지도 그리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도 남편은 어떻게든 진료를 앞당길 방법을 모색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예정된 날짜에 혜화동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자발성 두개내 저압증(뇌척수액 누출)' 진단을 받았다. 내 눈엔 요란법석이 따로 없었다.


당시 재무부서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계약한 공사 업체들에 기성금, 준공금 챙겨주느라 내 남편 아픈 일을 후순위로 제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 대신 남편과 동행해 준 친정엄마가 수화기 너머 말했다.


"아우 김서방 어쩌냐. '어므니이, 척수액이 줄줄 새고 있대요오.' 하면서 울 것 같이 해가지고는 시술하러 들어갔어. 겁은 많아가지고. 안쓰러워서 어떡하냐."


그때까지도 확신하지 않고 있던 나는 울먹이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걱정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시술받고 두세 달이면 낫는다고 했으니까.'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기대는 보란 듯이 빗나갔다. 두세 달이란 건 아주 교과서적인 완치 사례의 기간이었고, 남편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그동안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질환이기에 다양한 사례를 접해보지 못한 의사들은 국내 최고의 의료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를 겪었다. 남편은 여러 논문을 찾아보고 공부한 결과 외과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신경외과에서는 죽을병이 아니어서인지, 득 보다 실이 많아서인지 수술에 대한 의지가 거의(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없었다.


의학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나지만 이 병에 대한 접근의 오류는 여기서부터가 시작인 것 같다. 경막이 찢어진 건 외과적인 문제인데 그 증상이 두통이라서 신경과에서 진료를 본다. 협진이 필요한 시점이 와도 신경외과는 유병률이 낮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병 따위엔 관심이 없다. 이미 몇 년치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으니 여력이 없을 법도 하다. 그러니 신경과 교수님이 아무리 노력을 환자가 제 아무리 공부해 가며 의지를 불태워도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다. 남편은 정말이지 까다로운 병에 걸렸다.







   나는 이병의 가장 큰 특징을 "애매함으로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드는 병"이라 말하고 싶다. 불확실은 불안장애를 가진 계획쟁이 남편을 서서히 무너뜨렸다. 주변상황을 완벽하게 세팅하고 통제해야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남편은 투병기간이 석 달을 넘기자 불안함에 완전히 잠식됐다.  


"죽고 싶다 그냥. (안락사하러) 스위스 가고 싶다."


최악의 최악을 가정하며 매일이 지옥인 남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뱉는 '두려워, 무서워, 겁나' 3종세트와 스위스 타령에 나는 긍정 필터를 풀가동해서 되돌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


"잘 살고 싶다고 해.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아프지 않고 잘 살고 싶은 거잖아."


어느 날은 죽고 싶지만 치킨은 먹고 싶은 남편.


"치킨 먹을까?"

"나 잘 먹고, 스위스 가?"


"잘 먹고 잘 살자. 나을 거야~"


나는 치킨 별로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이 반갑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런 식의 대화를 반복하고 있으니 가끔은 나도 지치지만 되도록이면 다정하게 반응해야 다. 안 그러면 한 마리의 슬픈 고라니가 돼서 눈물을 떨구니까. 아... 기껏 번듯하게 키워놨더니 병이 나서 또 키우고 있네, 시어머니 아들.


내 아들만큼 이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을 때까지 잘 다독여 보리라 다짐해 본. 매일 울면서도 여전히 기름진 음식이 땡기는 남편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나의 낙천성은 긍정 시그널에 초점을 맞추므로 남편이 내뱉는 부정적인 말들을 소화해 낼 수 있나 보다. 다행히 나에게서 가장 큰 힘을 얻는다고 하니 최선을 다해 긍정에너지를 퍼올려야겠다. (신종 가스라이팅인가?! 무엇이 됐건 나을 때까지.)


지금까지 서로를 답답해하던 비관주의자와 낙천주의자는 어쩌면 의외로 상호보완이 꽤 괜찮은 조합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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