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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jiya Jul 22. 2024

잿빛을 이긴 노랑

지구별 적응기



   '월요일'이란 세 글자만으로도 우울한데, 열어젖힌 커튼 밖 풍경은 온통 잿빛이다. 건물이야 원래가 대부분 무채색이라지만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도 회색빛 입자에 덮여 제빛을 내지 못한다.


더위는 많이 안 타지만 눅눅함은 참기가 힘들어 룸에어컨을 켜고 출근 준비를 한다.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이 누구더라?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님(길지만 고마우니 풀네임으로 쓴다.) 감사합니다!!


고2 아들이 방학을 맞아 아침 준비가 여유롭다. 내 한 몸 준비하고 나가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기간이다. 친정엄마가 챙겨준 곡물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정성껏 개고, 외삼촌이 양봉해서 얻은 귀한 밤꿀도 한 숟가락 넣어 원래라면 거르던 아침식사를 챙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아들의 학교 1년 선배 아이와 마주쳤다. 키가 족히 185cm는 돼 보이는 그 아이는 항상 나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한다. 일생 작은 체구의 소유자인 나는 덩치가 크면 연장자처럼 느껴지는 유아기적 사고가 남아 있어서 그 아이가 고3 학생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부담스럽고, 투명인간 취급에 기분도 후져진다.


'애옹이(아들의 애칭) 얘한테 첨에 아는 체를 해가지고...'


아들이 고등학교 진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어느 날 등장한(그 애는 바로 전날 이사 왔다고 했다.) 같은 학교 선배를 보고 반가웠는지 주책바가지 아들이 아는 체를 하며 얼굴을 텄다. 그 후로 그 둘은 서로 쿨하게 인사를 하지 않고, 아는 얼굴 보면 조건반사처럼 고개가 숙여지는 나만 이렇게 종종 불편하고 무안한 몇 초간을 입만 삐죽 내민 채 견딘다. 차 시동을 걸면서 읊조리듯 말한다.


"아!! 짜증 나..."


운전을 하면서 차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니, 일부러 환한 연노랑 블라우스를 입었음에도 나의 존재 자체가 잿빛에 압도되어 한 덩어리의 회색 구름이 된 듯하다.


'오늘 하루는 우울하겠군.' 생각했다. 출근길 코스인 360도 커브길을 때까지는.






   한 순간에 기분이 반전됐다. 코너링의 짜릿함 때문에? 아니, 며칠 새 꽃송이가 풍성해진 달맞이꽃 때문에. 회색빛 속에서 기죽지 않고 상큼함을 뿜어내고 있는 레몬빛에 "오!!" 한 마디의 감탄과 함께 우울함이 날아갔다. 너희들 나를 위해 피었구나.


그래, 나는 달맞이꽃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머문 자리가 때로는 온통 잿빛이더라도 천진난만한 노란빛 에너지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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