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첫돌을 앞두고 시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이다. (이후에 사과를 받았지만 나는 아직 종종 떠오른다. 이런 기억만 골라 삭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사이좋은 부모님과 한 지붕 아래 화목하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면, 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것이 맞다.
소파가 놓인 거실에서가족끼리 단란하게 과일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는 일상을 나는 자라면서누려보지 못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어린 시절 나는 항상 외로웠고 또 불안했다. 사람 소리 없는 적막함이 무서워 집에 있을 때는 항상 TV를 켜놓았다. 거의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창구를 잠들기 전까지 끄지 않았다.나는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밖에서는 그런 결핍을 잘 숨겼는지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유복한 집에서 걱정 없이 자란 아이로 생각하곤 했다. 외롭고 불안한 정서가 나를 잠식했지만 다행히 나의 낭만적 기질이 항바이러스제처럼 작용해 아슬아슬하게 심리적 균형을 맞춰 주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렇지만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끊임없이 나를 채울 무언가를 찾으며 살았다.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염미정(김지원분)이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내 마음이 딱 그랬던 것 같다. 나의 결핍은 나로 하여금"모두와 화목함"을 꿈꾸게 했다. 자기 계발과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꿈은 꾸지 않은 채 단순히온전한 내 가정이 갖고 싶었다.그저 어느 화목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 산다면 참 행복할 것 같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결혼 이후 오히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나의 결핍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새로 생긴가족들이좋았다.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인정은 받고 싶었지만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세상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고, 당시 내 처지를 몰랐던 것이다.나는 그저 나 좋을 대로 이상주의자였다.많은 것들이 어긋나고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로울 때도 있었다.
그런 내가 엄마가 됐다. 당시엔 엄마가 되기에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 나이의 동생들을 보면 마냥 애기 같다. 그래서 만삭 때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보고 수군거렸나 보다 싶다.
남자들에게 군대이야기가 있다면 여자들에겐 출산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예정일을 열흘 앞두고 저녁부터 살짝 진통이 있었지만 친구가 준 꿀팁을 참고해 자정을 넘겨서 입원했다. 배랑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데 진행이 잘 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12시간째 진통을 하다가 의사 선생님께 수술하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더디긴 하지만 진행이 되고는 있으니 더 참아 보자고 하셨다. 야속했다.
'이렇게 아픈 걸 계속 참아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산모의 출산 후까지 고려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의사 선생님은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처음인데 부부가 아주 잘 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진통이 너무 길어지니 오후 2시쯤에 무통주사를 맞기로 했다.시어머니는 그게 아기한테 안 좋으면 어떡하냐고 걱정했지맘나는 설마 아기에게 해가 되는 걸 산부인과에서 해주려나 싶었다.
그 상황을 마주한마취과 의사가 말했다.
"산모는 아파 죽겠는데, 산모 걱정은 안 하세요?"
그때는 일단 몸이 너무 아프니 마음 상할 새도 없었다. 뜻밖의 내편을 만나 고마울 따름이었다. 무통은 신세계였지만 약발은 그리 길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진행을 더 더디게 만들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동갑내기 남편이 꼬박 24시간 곁을 지키며 힘이 되어줬다.
하늘이 노래지면 아기가 나온다더니 그 말 한 사람은 덜 아팠다. 하늘 볼 정신이 다 있고. 힘주느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간간히 눈을 떠도 보이는 건 분만실의 인공적인 조명뿐이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아기의 심박수가 떨어지니 남편이 호흡하라고 다그쳤다. 의사 선생님은 자기 역할을 대신해 주는 남편이 대견한 듯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아기는 저녁 8시 9분에 태어났다. 저도 나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울음소리가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우렁찬 "응애응애"가 아니었다.어린양처럼 "에에엥" 하고 소리 내는 아기가 낳자마자 안쓰럽고 애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