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갚은 고양이 (16편)

50년 만에 화가의 꿈을 이룬 나의 미술, 음악 그리고 고양이 이야기

by 김경미

꿈은 이루어진다 - 평생직장의 꿈, 음악에 빠진 아이들


1차 필기시험 이후 2차 면접과 신체검사 등 모든 관문을 통과하고 85년에 나는 7급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역시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드디어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소망해왔던 평생직장의 꿈을 이룬 것이다.


나는 입사와 동시에 그동안 우리 집 가장 역할을 전담하던 언니로부터 그 역할을 인계받았다. 내게 대학 입시공부를 권유하며 재수 1년 동안의 학비와 용돈, 대학 4년간의 용돈을 지원해 주던 언니. 나는 그런 언니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언니는 내게 가장 역할을 인계한 후 곧바로 그동안 준비해왔던 독일 유학 길에 올랐다. 나는 그간의 언니의 수고와 희생에 보답하고자 공무원연금공단에서 가능한 최대 금액을 대출받아 유학비용의 일부를 마련해 주었다.


입사 후 2년 뒤 나는 남편과 결혼했고 2남 1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임용된 자리는 출퇴근이 9 to 6로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던 관계로 나의 30여 년 직장 생활은 참으로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가난했던 남편과 나는 신혼을 산동네 방 한 칸짜리 월세로 시작하여 결혼 6년 만에 경기도 외곽에 간신히 작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곳은 집 값이 저렴한 만큼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자가용을 이용하면 출퇴근 시간으로 왕복 세 시간 이상을 허비했고 대중교통의 경우 지하철,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으므로 네 시간 가까이 소모되었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친정에서 잠시 살기도 했다. 만삭이 되어서도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퇴근했던 고단함을 어떻게 견디며 살았는지 요즘 젊은이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리라. 지금과 같은 임산부 보호석 역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임신 중인 여직원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워 대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이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직장생활과 세 아이의 육아를 병행했던 내게 음악, 미술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과 같았고 밤늦게 퇴근하여 아이들 뒷바라지를 끝내면 곧바로 다음 날 새벽 출근으로 이어지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분주했던 27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우리 가정에 여러 가지 부침도 많았다. 남편과 나는 열심히 돈을 모으고 대출을 받아 서울로 이사를 했고 아이들은 바쁜 엄마가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기에 각자 알아서 성장했다.




아이들 교육에 있어 나는 나름대로의 철칙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엄마의 간여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해주기를 원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인해 선생님들께 다가가지 않았던 나의 성향은 아이들의 선생님들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의 영향력으로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들의 무관심 가운데라도 잡초처럼 강인하고 올바르게 커 주기만을 바랬다.


나는 아이들 학교를 방문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철저히 학교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엄마의 별난 교육방침 때문일까? 세 아이들 모두 학교에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라고 해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주기 바라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때문에 친구나 동기들의 잘 나가는 아이들과 비교될 때면 부러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공부는 때가 되면, 본인이 깨닫는 순간이 오면 다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라고 굳게 믿는 엄마였다.


결국 세 아이가 삼수, 재수 그리고 또 재수를 하여 세 아이 모두 입시를 끝내는데 도합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들 입시에 모든 것을 바치는 평범한 엄마였다면 지레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기죽지 않고 열심히 재수 비용을 대면서 “우리 아이들은요~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니까요~!!”라고 말하며 호기를 부리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도대체 공부를 하지 않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큰 아이 고교시절, 밤늦게 퇴근하여 아들 방문을 열어보면 항시 까치집 머리를 한 채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럴 경우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쓴 자서전의 글귀를 떠올리며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이 회장님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멍하니 누워 있는 것을 야단치지 말라 하셨는데 “아이들이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는 것은 머릿속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고하는 것이지 게으름을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로 어지럽혀져 있는 아이들의 방을 보면 한숨부터 나왔지만 이 역시 마이크로 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의 말씀을 떠올리며 참아 냈다. 게이츠 회장님 말씀은 본인이 항상 방을 어질러 놓고 살아 아버지로부터 늘 지적을 받았는데 대략 “그 속에서도 질서가 있었고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중학교 때는 마술에, 고등학교에 다니며 음악에 미쳐 대학 입학의 목표가 음악 밴드 활동이던 큰 아이도, 공부는 뒤로하고 온갖 창의적인 발상으로 멋지게 노는 것이 목표였던 둘 째도, 초등시절부터 온갖 사건에 연루되어 말썽을 도맡아 부리던 셋 째도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참아주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해 주려 애썼다. 나는 마술이나 음악 등에 빠져 있던 아이들에게 늘 말했다.


“그것이 지금은 별 볼일 없어 보이겠지만 언젠가 네 인생에 귀중히 쓰일 날이 있을 거야. 꿈을 크게 갖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라”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나는 100% 확신한다. 내 삶 가운데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경험을 많이 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들들이 음악에, 기타에 미쳐 사는 것이다. 어려서 음악을 그토록 좋아했던 내가 꿈꾸었던 바로 그 소망이 제대로 실현된 것이 아닌가! 아니 적당히 이루어졌어도 괜찮았을 그 꿈이 도가 지나칠 만큼 과잉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큰 아들이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들이 고3 이 될 즈음이었다. 늘 새벽 출근, 늦은 밤 퇴근을 밥 먹듯 하던 나는 평소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큰 애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변명 같지만 퇴근 후에는 항상 늦둥이 막내의 육아가 최우선이었으므로 나는 큰 아이가 음악, 기타에 빠져 있던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첫 대학 수능고사를 치르고 보니 전국 어디 한 군데 원서를 넣을 곳이 없었다. 결국 재수를 해야 했고 재수 결과 역시 지방대 이하에나 원서를 넣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때 큰 아들이 말했다.


“삼수를 해서 연세대 신방과를 목표로 공부하겠습니다.” 나는 그 순간 “아니 이게 무슨 허파에 바람 들어 간 소리야!!”라고 외칠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수 끝에 지방대도 가기 어려운 성적을 거둔 녀석이 할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인내심을 발휘해서 이야기했다. “네 결심이 정 그렇다면 독하게 1년을 더 노력해 보려무나”


보통의 성공 스토리의 경우 큰 애는 이듬해 삼수 끝에 멋지게 연세대 신방과에 입학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큰 애는 결국 그 같은 신화를 이루지 못했고 간신히 인 서울 대학 IT 학과에 일부 장학금을 받고 입학에 성공했다. 그 장학금은 영어, 수학에 조금 자신 있던 큰 애가 교차지원 (문과 학생이 이과로 지원하는 것) 결과 이루어 낸, 우리 세 아이들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소박한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은 말이나 생각을 할 때 정말 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 애가 연세대 신방과 입학을 목표로 삼수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아니 이게 무슨 허파에 바람 들어 간 소리야!!”라고 외쳤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큰 애가 삼수를 하던 그 해 6월 실제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는 증세의 “기흉”이라는 병으로 일주일 이상을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큰 애는 당초 공부보다는 밴드 활동을 위해 대학 가기를 원한 아이였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가기 전까지는 오직 밴드 활동에 올인했고 나는 그런 아들이 좋아 홍대 근처 클럽 공연에 응원 차 두어 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아들은 식구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가급적 피했는데 어쩌다 한 번 내 앞에서 기타나 건반을 연주해 주면 나는 그런 아들이 미치도록 자랑스럽고 좋았다.


둘 째도 역시 공부에는 크게 뜻이 없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 후 미술을 시작하였고 재수 끝에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어느 집안이나 딸은 엄마의 친구 같은 존재이다. 늘 말괄량이에다 공부는 아니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말썽을 피워도 언제나 소중한 딸이었다.


나는 딸에게도 역시 무엇이든 스스로 해 나가도록 했는데 대학 입학 후 서울 외곽에서 자취를 하던 딸이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짐을 옮길 때조차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혼자 버스를 타고 이동하게 한 어찌 보면 모진 엄마였었다.


철없던 딸이 부쩍 성숙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키부츠 공동체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후였다. 우연히 모 강연을 통해 키부츠 공동체 생활에 대해 알게 되었고 딸에게 봉사활동 참여를 권유했었다. 3개월을 그곳에서 외국 아이들과 생활하고 돌아온 딸은 예전의 철없던 딸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봉사기간이 끝난 후 매달 받은 사례비와 용돈을 모아 친구들과 한 달간 주변국과 유럽 등지로 여행하면서 세상에 대해 알게 되고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되어서일까?


대학 졸업 후 구멍가게 규모의 작은 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딸은 스스로 서너 차례 회사를 옮기면서 지금은 꽤나 유명한 IT 업체에 다니고 있다. 디자인에 IT능력을 겸비한 인재로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물론 어려서부터 공부에 뛰어나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고 이후의 삶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는 것 또한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던가!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그러한 엄마의 전철을 밟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고맙고 대견할 뿐이다.


큰 애는 음악에만 빠져 살다가 군대를 제대한 후 비로소 진로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광고를 공부하고 싶다며 광고홍보학과로 전과, 광고와 관련된 전국단위 동아리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고 결국 대학 4학년 때 모 대그룹에서 주최한 광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큰 애가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들이 상을 받아 기쁜 것이야 당연지사이고 그보다 더 뿌듯했던 것은 나의 독특했던 교육방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이 광고인으로 변신하는데 그동안 열정을 다했던 음악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재 굴지의 광고업체에 근무하며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는 큰 애는 최근 자작곡 음반을 발매하는 등 여전히 음악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늦둥이 막내 또한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아직까지 대학에 재학 중인 막내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내 밴드 활동을 했고 특히 음향과 영상에 관심이 많아 관련 공부를 지속하고 있다. 또한 매부, 그리고 매부의 형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연주활동도 하고 있다. 막내의 매부, 그러니까 나의 사위는 밴드에서 드럼을 치고 있으니 가히 우리는 음악 가족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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