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들어서는 내게 엄마는 한 통의 전보를 내미셨다. “귀하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으니 2차 면접시험에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오르고 방바닥을 구를 만큼 기뻐했다. 나는 당시 가족 모두의 희생으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절망 속에서 6개월 이상을 백수로 살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졸업 직전 중, 고등 교사를 뽑는 순위 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한 나는 교직이 아니더라도 일단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기업들은 대졸 여성을 공채하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순위 고사는 당시 전국적으로 사립대 사범대학을 나온 학생들이 교직으로 진출하기 위해 치르는 시험이었다.
역사학 교원의 경우 매년 전국 수요가 5-6명 전후였는데 희망자는 수천 명 이상이었으니 참으로 어려운 관문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요즘 젊은 남성들이 주장하는 군 가산점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따라서 역사 선생님을 꿈꾸는 여성들이 뚫고 나아가기에는 참으로 힘겨운 도전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졸 경력으로 타이피스트라도 취업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가능성이 희박한 이듬해 순위 고사에 다시 도전한다는 막막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학생과에서 우편을 하나 받았다. 국가안보 업무를 전담하는 정부기관에서 최초로 여성 직원을 공채한다는 공문이었다. 대학 졸업 직전 취업이 난감했던 내가 학생과에 취업희망서를 제출한 바 있었는데 잊지 않고 안내서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공채 요강을 보니 필수과목이 국어, 영어에 선택과목 하나, 그리고 논술이 두 과목이었다. 그나마 내가 자신 있는 것은 논술 과목 중 하나인 국사뿐이었다. 그러나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만큼이나 절박했던 나로서는 무조건 도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여성에게 문이 열린 공채였기 때문에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편이다. 유년시절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좋은 환경에서 살아온 경우가 거의 없었고 늘 힘겨운 가운데 어렵사리 목표를 향하여 도전하며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대부분의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항시 운이 따라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교시절 부기 1급 자격시험을 볼 때였다. 시험지를 받아 보니 며칠 전 내가 풀어 본 바로 그 문제가 출제된 것이 아닌가! 물론 그만큼 많은 문제를 접해 본 노력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풀어본 바로 그 문제가 시험에 나왔을 때 그 기쁨과 환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결과는 전교에서뿐만 아니라 함께 응시한 학원 친구들 중에서도 유일한 합격이었다.
입사 시험 때도 마찬 가지였다. 국사가 그나마 유일하게 자신 있는 과목이기는 했지만 며칠 전 찻집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 잠시 읽었던 한국사 책, 바로 그 내용이 논술 문제로 나올 줄이야! 내 머릿속에 책의 내용이 훤히 보였기에 거의 만점에 가깝게 논술을 써내려 갈 수 있었다. 역시 결과는 1차 관문인 필기시험 합격이었다.
내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은 시험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 치명적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고2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77년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상업학교 학생들은 부기 외에도 타자, 주산 등 각종 자격증을 따야만 했다. 취업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으므로 방과 후에는 타자, 주산, 부기를 배우기 위해 학원가를 전전했다.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이 입시학원을 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시내뿐만 아니라 변두리에서도 타자 학원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만큼 타자실력은 취업을 위한 기본 자격이었다.
당시 타자 학원의 수강료는 월 5천 원 정도였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상 그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는 원장님 외에 평소 내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던 스무 살가량의 남자 직원이 홀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가 나의 가정형편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내게 매일 새벽 5시에 학원에 나와 아무도 없을 때 타자연습을 하라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일찍 일어나 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학원과 집은 걸어서 약 40분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집에서 4시 20분에는 출발해야 5시에 학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어 이른 새벽에는 버스 운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도 무모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부모님께 5천 원의 부담을 덜어 드린다는 생각으로 매일 새벽 4시 20분이면 어김없이 그 추운 겨울 새벽에 혼자 집을 나섰던 것이다.
한 열흘 이상 걸어 다녔던 것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10여분쯤 걸어가는데 가로등도 없이 칠 흙같이 어두운 길가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기사 분은 창문을 내리고 내게 매일 새벽 어디를 가는지를 물어보셨다. 추운 겨울 매일 동일한 시간에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혼자 걸어가는 내가 매우 의아했던 모양이다. 내가 학원에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더니 흔쾌히 택시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택시에 올라탔고 그분은 거의 열흘 이상을 매일 새벽 나를 학원까지 데려다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기사분이 택시의 방향을 돌렸다. 강북에 있는 정릉 근처에 가면 아리랑 고개라는 곳이 있다. 그 고갯길에 들어서면 북악 스카이웨이 쪽으로 연결되는 으슥한 곳이 있었는데 학원 방향은 직진을 해야 하건만 아리랑 고개 쪽으로 우회전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기사분에게 “아저씨 무슨 일이 있으셔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
밖은 겨울 새벽, 아직까지 칠 흙 같은 어둠이었다. 그 기사분은 어느 한 편에 차를 세우고 한 참을 머물러 계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던 그분은 다시 차를 돌려 나를 학원 앞에 내려 주었고 그날 이후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 얼마나 더 새벽길을 걸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 하다.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이 십여 년이 훌쩍 지난 30대 후반 정도였던 것 같다. 한참 신문지상에 치한들의 여성 강간살인 및 납치 등 강력범죄 기사가 오르내리던 그때 나는 그날 기억을 떠올리며 당시 그분의 행동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분은 어떻게 아무 일 없이 나를 무사히 보내주었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으로 끔찍한 순간이었다. 역설적이지만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나를 지켜 준 기사분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까지 들 정도이며 너무나 무모하고 바보 같을 만큼 순진했던 내가 정말 어처구니없을 뿐이다. 그 시대가 그나마 순수한 시절이었기에 그 기사분도 나도 현재까지 이렇게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기사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계실지! 역시 나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