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타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언젠가 반드시 배우고자 마음먹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오빠 덕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도 오빠가 어디서 인가 기타를 구해왔기 때문이다. 오빠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다는 것을 처음으로 내게 알게 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트럼프와 화투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온갖 잡기 -예를 들어 포커, 훌라, 고스톱, 섰다 등-에 능한 것이며 야구, 축구 등 모든 스포츠를 광적으로 좋아해 대학시절 프로야구는 물론 고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박찬호, 김병현의 메이저리그 경기만큼은 새벽잠을 설치면서까지 놓치지 않은 것도 모두 오빠의 영향이었다.
남자 형제가 없었던 오빠는 막내였던 나를 데리고 놀면서 온갖 것을 다 가르쳐주었다. 하다못해 과거 재래식 부엌이나 천정에 들끓던 쥐 잡기 놀이에까지 나를 동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그런 끔찍한 놀이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억울하지만 당시에는 멋모르고 오빠의 사냥놀이에 신나게 참여했었다. 나는 남들보다 유달리 쥐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공포스러워하는데 그때 쥐들에게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 고등학교 시절 오빠와 가끔 극장가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당시 나의 아이돌이었던 크리스 미첨 주연의 “서머타임 킬러”나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스팅” 등이 기억난다. 무엇보다 오빠는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 이후의 주인공의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내게 말해 주곤 했다. 어린 내 마음에 그런 오빠의 상상력이 참으로 그럴싸하고 너무나도 멋지게 생각되었다.
약간 폼생폼사의 과시 경향이 있던 오빠는 어느 날 종로 3가 모 극장에서 작은언니, 나와 함께 영화를 본 후 인근에 있던 근사한 경양식집으로 데려가 함박스테이크를 사주었다. 다진 고기 위에 노른자위가 탱글탱글한 계란 프라이가 얹어져 있던 그 환상적인 비주얼과 맛의 어우러짐이란!
멋진 영화를 보고 난 후 난생처음 칼질을 하며 함박스테이크를 먹는 그 순간까지는 정말 좋았다. 그러나 식사를 끝내고 계산을 하려던 오빠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뒤졌으나 아뿔싸….!! 지갑을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이 아닌가! (극장표는 어떻게 구매했지?)
결국 식당 주인으로부터 일장 훈계를 받고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오빠의 오리엔트 손목시계를 저당 잡히고 난 뒤에야 우리는 간신히 식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죄도 없이 오빠 옆에서 함께 수모를 당해야 했던 여학생 작은언니와 나는 얼마나 그 상황이 황당하고 창피했던지!
그랬던 오빠가 월드컵을 몇 달 앞둔 2002년 봄, 너무나도 이른 오십의 나이에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빠가 결혼한 후 어려서 만큼 교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폐암 투병을 할 때 오빠와 병실에서 단 둘이 있었던 짧은 시간,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해 고통받던 순간들, 또한 숨쉬기 조차 힘들어하던 마지막 모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오빠는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라는 자의식 때문인지 그 누구보다도 집안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었다. 함께 고생하던 어린 시절, 추운 겨울에 여동생들과 안방 아랫목 이불 밑에 발을 뻗고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너희들 용돈은 물론 옷까지도 모두 내가 책임 질게”라고 허풍 떨던 소년 오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빠가 아버지, 엄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오빠가 모시던 부모님은 장애가 있던 큰언니 부부와 함께 사시게 되었다. 나와 다른 언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관계로 부모님을 모실 수 없는 형편이었다. 평생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파하고 걱정했던 큰 딸이 오히려 하늘나라로 가시는 그날까지 당신들을 편히 모시게 되었으니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