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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인생이 재미없는 건 꿈이 없어서야.

 나는 멋진 어른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착한 어른이 되고 싶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 방어적으로 대할수록 상처의 크기는 더 커졌다. 늘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내가 바르고 착한 어른이 되는 법을 고민했지만 유독 서툴고 어려웠던 건 “사랑”이라는 감정, 그리고 “연애”였다. 

나는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우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다. 한 번도 사랑을 본 적도,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던 나는 그 감정이 너무 낯설고 어려웠다. 표현하는 방법도 받는 방법도 늘 서툴렀고, 이성 앞에서만 서면 긴장되고 어색했다. 자꾸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마음과는 다른 말들로 상대를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잘해주면 질린다 했다. 까칠한 게 매력인 줄 알았는데 숙맥이라며 한 달 만에 차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자주 안부를 묻는 것이 집착이 되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서툰 나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평소 꿈꾸던 이상형과도 같은 남자를 만난 것이다. 그는 내가 좋다고 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가도 밝게 웃는 내 모습이, 특히 작은 손으로 입을 겨우 가리고 고개를 뒤고 젖히면서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했다. 1년 넘도록 한 남자만 짝사랑하던 한결같은 내 모습에 끌렸고, 알면 알수록 밝은 사람 같아서 늘 함께이고 싶다 했다. 그날 밤 난 행복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서툰 연애, 나쁜 연애만 해오던 나에게도 이런 꿈같은 일이 찾아오는구나. 

그렇게 나는 예쁜 사랑을 시작했고, 그는 나에게 사랑하는 법을, 사랑받는 법을 알려주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는 나를 아끼고 소중하게 대했다. 처음으로 내가 사랑스러운 여자라고 느끼게 해 주었다. 그의 말투에는 언제나 다정함이 묻어있었고 눈빛에는 항상 확신이 가득했다. 그의 사랑은 순수했지만 불처럼 뜨거웠다. 늘 사랑받는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도 내 입가는 늘 귀에 걸려있었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어느 날, 이번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다정하던 그가 갑자기 나에게 이별을 고한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린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의 눈은 하트 모양이었고 꿀이 뚝뚝 떨어졌는데. 

처음엔 그저 짓궂은 장난인 줄 알았다. 마침 그날이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둔 날이라 근사한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하려는구나! 

하지만 다시 한번 이별을 고하는 그의 표정, 그의 말투는 진심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잘못을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는 그를 붙잡았다. 

그런데 그는 첫사랑에게 돌아가겠다 했다. 그의 첫사랑은 이미 몇 달 전에 결혼한 유부녀인데. 

나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돌아와 달라는 첫사랑에게 흔들렸다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이혼하는 건 아니라 했다. 기가 막혔다. 그는 비록 세상에 당당하지 못할지라도 그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고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알고 있던 밝은 세상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내 사랑은 결국 모진 상처가 되었다. 첫사랑이라던 그 유부녀는 당당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요. 그 사실은 제가 결혼했어도 변하지 않고요.”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이별을 고하자마자 크리스마스 밤을 함께 보냈고 나는 그날 밤 내내 하혈을 했다. 심지어 다음 날은 출근도 하지 못했다.

아침 드라마에서나 보던 말도 안 되는 막장이 현실이 되어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유난히 캐럴이 슬프게 들리던 그 해 크리스마스.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나질 못했다. 마침 참아왔던 눈물도 터져버렸다. 버스정류장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가엾게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도와주지 않았다. 괜찮냐고, 도움이 필요하냐고 아무도 묻지 않는다. 

모진 폭력과 가난으로 멍든 어린 나에게도 세상의 어른들은 이렇게 무관심했었지. 또다시 세상이 원망스러워졌다. 세상의 어른들이 미웠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때는 그냥 모든 게 원망스럽고 외로워서 누구든 나를 도와주기를 바랐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내 세상은 사랑과 행복함으로 가득했는데.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감히 희망을 가졌다. 언젠가 나도 당당하고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세상은 모두 다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난 이후 내 일상은 서서히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여전히 아침엔 출근을 하고 저녁에는 아무렇지 않게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린다. 그러다 갑자기 추억과 슬픔과 서러움이 북받쳐 오를 때면 차라리 감정 없는 로봇이고 싶다.

실컷 소리 내어 울고 싶지만 곧 동생이 알바를 끝내고 집에 돌아올 시간이다. 

 얼마 전 너만큼은 꼭 대학에 가라며 어렵게 얻은 전셋집에 동생 방을 내주었다. 다행히 동생은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교에 진학을 했고 적어도 동생의 대학생활이 치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물질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고 싶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가끔씩 알바를 했지만 다행히 공부에 잘 집중하고 있었고 학점도 늘 좋았다. 그런 동생에게는 내 슬픔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 

 집에만 있지 말라는 친구의 말에 동호회 활동도 취미생활도 해봤지만 아무것도 흥미롭진 않았다. 누굴 만나도 재미가 없었다. 특히 회사생활이 너무 지루했다. 

영혼이 사라진 껍데기가 내 일상을 겨우겨우 채워가는 느낌이다. 몇 번의 이직을 했지만 회사가 문제라기보단 직업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왔다. 직업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굶어 죽진 않을 거라던 엄마의 말에 시작한 일이었으니 지금 밀려오는 회의감은 당연하다. 동생과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지만 내 통장잔고는 매우 가난하다. 나름 열심히 치열하게 산 것 같은데 곧 서른을 앞둔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이다.

단순히 그와의 이별로 슬픈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재미없고 지루한 내 일상이 그와의 이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자존감마저 모두 사라진 기분이다.     


 마침 자존감에 대한 책과 강의가 유행이라 관련 서적을 하루 종일 읽어봤지만 허탈했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 현실적이지 않았고 자존감이 뭔지, 왜 필요한지도 모르는 나에게는 모두 허무맹랑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니?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 낯설고 이상한 말 같아서 단어 하나하나를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았다. 온전히 이해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해결해야 그다음 플랜으로 갈 수 있는데, 무작정 자존감을 높이라고만 하니, 그게 현실적으로 와닿을 리가 없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고 화가 났다. 곧 서른을 앞둔 내가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자존감이란 감정조차 제대로 모르는 나는 루저 같고 애송이 같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별로 상처받았다고 슬프다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다. 난 곧 서른이고 이제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주변에 30대는 다 근사한 어른 같아 보인단 말이지.

일단 자존감? 그건 잘 모르겠고 어렵다. 뭐라도 좋으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나라도 해보자! 

그러다 보면 조금이라도 자신감이 생기겠지? 

자신에게 선물을 해주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서 생각해보니 10대 때부터 20대까지 참 열심히 살았으니 선물 받을 자격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뭘 선물해주면 좋을까? 곧 서른이니 스스로에게 30살 축하선물을 해보자! 

그날부터 많은 고민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이나 잘하는 일이 뭘까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도 못해봤던 고민이다. 서른이 되도록 왜 하고 싶은 게 하나 없을까 자괴감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민을 거듭할수록 내 가슴을 조여 오는 일이 있었다. 바로 직업!

출근만 하면 내가 아닌 것 같다. 영혼 없는 껍데기가 내 일상을 겨우겨우 채워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자존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후부터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급기야 죄책감마저 들었다. 왜 이 재미없는 일을 억지로 하고 있을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오히려 스무 살 때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가 훨씬 재밌고 행복했다.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는 건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숫자를 들여다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은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일을 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되니 퇴근 후에도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을 덮기 위해 쓸데없는 술자리를 갖고 흥미도 없는 취미생활을 억지로 이어갔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점점 문제가 무엇인지 시야에 들어오자 내 안에서 꿈틀댔다.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변화가 두려워서 이대로 30대를 보내버리면 40대 역시 똑같을 것이다. 10년을 경험했는데 앞으로 10년은 다를 거라는 헛된 희망은 하지 않는다. 

세상은 나에게 다정했던 적이 없으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변화해야 한다면 가장 빠른 시기는 오늘 당장이다. 40대는 더 어른스러워야 하니까.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일할수록 커져가는 부정적인 생각에 금방이라도 영혼이 질식할 것 같았다. 스스로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정했다. 그 안에 다른 직업을 갖든 굶어 죽든 무조건 1년 후엔 그만두자! 

서른 살 기념으로 퇴사를 하고 20대 마지막 선물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직업과 30대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유럽여행을 간다는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었다. 

맞아, 나 어릴 때 세계지도 보는 것 좋아하고 나라 이름 수도 다 외웠는데! 

어른되면 그 나라들 다 가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릴 때 잘하는 것이 운동, 글쓰기 그리고 나라 이름과 수도 외우기였다. 누가 더 많이 외우나 동생이랑 내기도 하고 그랬다. 

어른이 된 지금은 아무리 고민해봐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았었지. 그럼 어릴 때 해보고 싶었던 것을 이루어보면 되지 않을까?

나의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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