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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까칠한 척하지 마! 알고 보면 넌 착한 아이야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어설픈 화장조차 귀엽고 이쁜 친구들은 대학교 신입생 티가 팍팍 났다. 유일한 회사원이었던 나는 대학생활에 들뜬 친구들의 대화에 잘 끼지 못했지만 대학생활이 얼마나 설레고 재밌는 일인지 한껏 상상하느라 즐거웠다.

대화 도중 친구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대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난 공부를 못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가고 싶은 학과도 있었는데 국어국문과에 진학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성적도 언어영역은 언제나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어디 여자가 대학교냐는 아빠의 윽박지름과 억지가 나의 현실이었다. 당장은 공부보다는 이 가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내 사정을 좀 아는 친구가 내 편을 들어주었다.

“얘가 일찍 철들었잖아~ 돈 벌어서 스스로 가려는 거지 나도 그럴 걸 그랬나 봐 ”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학자금 대출도 있는데 빨리 가서 빨리 졸업하는 게 좋지”

친구는 친절히 학자금 대출받는 방법과 상환하는 법까지 알려주었지만 난 털어놓을 수 없는 내 현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장 등록금은 해결할 수 있겠지만 차비며 교재비는? 집도 외진시골이라 자취라도 해야 한다면? 중고등학교도 힘들었는데 대학생활은 얼마나 더 힘들고 비참할까! 또 돈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러야 할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친구들은 한창 원하는 대학과 과를 고민하며 미래를 꿈꿀 때 나는 차비조차 구걸해야 하는 전쟁같은 학교생활을 버텼다. 나를 미워했던 선생님과는 제대로 된 진로 면담 한 번 해본 적이 없었고 부모님은 여전히 내 꿈은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는 미래를  꿈꾸는 법을 몰랐다. 

누구나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 미래와 직업에 대한 고민도 없이 카드회사, 반도체 회사, 카페를 전전하며 일단 돈을 벌었다. 학교에서 취업을 연결해주기도 하지만, 성적이 좋은 친구들만 순차적으로 좋은 회사에 취직할 기회가 있었고 나처럼 평범한 성적으로는 당장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자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됐지 요즘 세상에 무슨 대학이냐며 윽박지르던 아빠는 월급날만 되면 돈 좀 보내라고 난리다. 엄마는 매일 아프고 힘들다며 신세 한탄을 하신다.      


‘내가 부모복도 없고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마저 없어서 이 모양 이 꼴이야’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매일 듣던 소리다. 매일 이유 없이 맞으면서 괴로워하던 어린 나를 앞에 두고 엄마는 매일 저렇게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다가 나를 붙들고 울기도 했다.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엄마가 우니까 따라 울었다. 이 모든 게 다 아빠 탓이라고 하니까 정말 그런 줄 알고 믿었다. 그런데 자식복도 없다는 소리를 왜 학대받는 자식 앞에서 매일 하셨을까. 

이유 없이 매 맞고 가난에 방치됐던 우리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으셨던 걸까.

아직도 엄마의 저 (시체 냄새가 날 것만 같은) 말들이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있다. 

불현듯 머릿속에 맴돌아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든다.

나를 쓸데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몸집이 커져 아빠의 폭력은 줄어들었지만 욕설, 폭언 그리고 엄마의 신세한탄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부모님, 날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겠다. 나를 모르는 곳이라면 상처를 들키지 않고 행복한 척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어느 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전재산을 탈탈 털어 보증금 100만 원에 월 20짜리. 화장실도 주방도 없는 손바닥만 한 집을 겨우 구했다. 이모가 쓰던 침대와 고물상에서 주운 티브이 하나가 전부였다. 

당장 난방용 기름이 필요해서 엄마에게 사정사정해 겨우 3만 원을 빌렸다. 3만 원이면 기름 두 통에 라면도 몇 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지만 은행 수수료를 떼고 나니 2만 원 남짓. 

기름은 한 통뿐이다. 기름 한 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찬물로 씻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가스버너에 물을 조금씩 데워 썼지만 냄비도 버너도 작아서 큰 차이가 없었다. 

밤에는 유일하게 하나 있던 롱 패딩에 몸을 있는 대로 구겨 넣어 겨우 잠을 청했다. 그러다 새벽에 머리가 너무 시려서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어찌나 몸을 구겨 넣었는지 목부터 발가락 끝까지 온몸이 뻐근했지만 너무 추워서 몸을 펼 생각조차 못한다. 드라이기로 겨우 머리만 데우고 패딩에 뜨거운 공기를 채운 후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다. 침대 위에 커다란 바위가 되어 굳어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렇게 괴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모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가수가 가난했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데 새벽에 머리가 시려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데우고 잤다는 말에 순간 내 비밀을 누가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렇게 난 그 연예인의 팬이 되었다.


 이제 전재산을 다 털어 집을 구했으니 당장 돈을 벌어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월세와 생활비가 급하다 보니 이상하지만 않아 보이면 일단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생각보다 순진했다.

한남동의 유명한 호텔 근처 커피숍에서 일할 때는 이상한 유흥업소에 팔려갈 뻔한 적도 있었고(옷을 다 벗고 봉춤을 추는 그런 요상한 클럽이었다) 가수 데뷔시켜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이상한 피라미드에 빠질 뻔한 적도 있었으며 같이 일하면서 친해진 언니가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기에 따라갔더니 또 이상한 술집(이번엔 봉춤은 아니었지만)이었다. 

 처음 일했던 커피숍은 커피만 파는 게 아니라 저녁에는 술도 (주로) 팔았는데 나는 카페가 원래 다 그런 곳인 줄 알고 열심히 술 서빙을 했고 가끔 주는 팁에 좋아했다. 알면 알수록 서울은 참 위험한 세상이다. 다행히 어디 팔려가지 않고 별 탈 없이 나왔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카페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회사’에 다니며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오전에는 텔레마케팅 영업을 하고 퇴근 후에는 버거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2시. 그렇게 월급을 다 합치면 백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 4-5시간씩 자면서도 나를 모르는 낯선 서울생활이 좋았고 어떻게든 이곳에서 잘 지내고 싶었다. 

다행히 햄버거 가게에는 또래 친구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좋았다. 나에게 야무지게 일을 잘한다며 치켜세워주는 또래 오빠가 있었고 밝아 보인다며 살갑게 대해주는 매니저 언니도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함께 일하며 친해진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2시간씩 햄버거 패티를 굽고 빵과 채소를 나르고 버거를 포장했다. 

저녁식사는 늘 햄버거였는데 직급에 따라먹을 수 있는 햄버거가 정해져 있었다. 가장 낮은 직급의 파트타이머는 가장 저렴하고 맛없는 불고기버거만 먹을 수 있었다. 매니저 이상이 되어야 와퍼를 먹을 수 있었는데 매일매일 진한 고기 냄새를 맡으며 와퍼 패티를 굽던 나는 그 맛이 너무 궁금했다. 한 번도 와퍼를 먹어보지 못한 나는 어느 날 친구에게 신세한탄을 했다. 마침 마감 근무조였던 그 친구는 매장 마감을 하면서 매번 남는 와퍼를 챙기는데 다음번에 내 몫을 챙겨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친구는 정말로 와퍼 버거를 하나 가져다주었다. 무려 치즈가 두 장이나 들어간 치즈 와퍼로!!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이 햄버거 하나가 내 시급보다도 훨씬 비싸다니! 곧 근무 시간이라 당장 먹을 수가 없어 엄청 푸짐해 보이는 그 버거를 한참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본 후 다시 포장지로 고이고이 감아 사물함에 넣으려는 순간! 햄버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빵과 패티가 분리되면서 더러운 카펫 위에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다시 주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진 햄버거를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이 햄버거 하나가 뭐라고. 

그 이후로 다시는 와퍼를 구경할 수 없었다. 서러워서 일부러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후 나는 내가 일하던 그 햄버거 가게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내가 번 돈으로 당당하게 와퍼세트를 주문했다. 그렇게 처음 맛 본 와퍼는 완전 꿀맛이었다. 와퍼가 바닥에 더럽게 나뒹굴던 그날, 어린 시절 맞으면서도 꾸역꾸역 미역국을 먹던 서러운 기억이 되살아났고 그 기억은 나를 독하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어른이니까 눈치 보지 말고 내 돈으로 사 먹겠어.’   


 그날 이후로 다행히 안정적이고 괜찮은 회사에 취업을 했다. 운이 좋았기에 최선을 다했다. 인사를 열심히 했고, 야근도 열심히 했고 말대꾸 한 번 하지 않고 일단 하라는 대로는 다 했다. 열심히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다달이 적금도 할 수 있었고 이쁜 옷도 신발도 살 수 있었다. 더 열심히 일해서 내년에는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천만 원짜리 적금도 빨리 채우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힘든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정말 참기 힘든 건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대부분 여자라 회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가도 금세 살얼음판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선배들의 기싸움에 피가 말렸다. 순진하고 눈치가 없었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화살받이’가 됐고 곰처럼 둔했던 나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옆자리로 야무져 보이는 언니가 새로 입사했다. 두 살 위 언니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첫인상처럼 언니는 야무지게 일을 잘했고 성격도 털털했다. 무엇보다 나를 잘 챙겨줬다. 나는 그때까지 회사 직원이나 선배들과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 언니와 친해지고부터는 퇴근 후에 같이 저녁을 먹거나 가볍게 술 한잔 하는 날이 많아졌다. 회사 험담도 하고 날 괴롭히는 선배들 욕도 하면서 맥주 한잔을 들이켜는데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재미를 몰랐을까?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같이 여행도 가고 노래방도 갔다. 힘들고 괴로운 회사생활이 이렇게 재밌어질 줄 몰랐다. 

언니는 효율적인 문서정리 방법, 상사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보고서 작성 방법, 실수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요령 등등. 내가 잘 모르는 것부터 내가 알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까지  다양하게 알려주었다. 특히 선배들의 기싸움에 휘둘리지 않는 다양한 팁에 대해서 매일 알려주었다. 좀 더 여우처럼 살던가 아예 모르쇠로 살아야 한다면서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면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행동요령을 매일 알려주었다. 매번 투덜투덜 잔소리를 하다가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선 나를 챙겨주고 도와줬다. 언니 덕분에 나의 회사생활이 재밌어졌을 뿐 아니라 나도 언니처럼 현명해지는 것 같았다. 

언니 덕분에 그나마 다닐 만하다고 생각했던 회사생활에 다시 슬럼프가 찾아왔다. 인사고과로 인해 친했던 언니들과 나는 모두 다른 부서로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다시 적응해야 했다. 

그저 질문에 대답한 것뿐인데

“화나는 일 있어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먼저 말을 건넨 것뿐인데

“오늘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나는 여전히 까칠하고 서툴기만 했다. 아직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화나는 모습으로 있던 내 모습이 여전히 표정이나 말투에 묻어있는 것일까? 너무 스트레스였지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오해했고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주눅이 들어 세상과 멀어져 갔다. 

업무는 곧잘 적응했지만 사람들과 다시 처음부터 친해지고 어울려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였다. 선배들의 기싸움에 여전히 화살받이처럼 불똥이 튀어도 언니의 충고대로 모르쇠로 일관하며 방관했지만 여전히 나는 겉돌았고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술 한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털어놨다. 그러자 언니는 전부터 해주고 싶던 얘기라며 나에게 충고했다.     


“넌 알고 보면 어른스럽고 참 착하고 여린데 왜 그렇게 까칠한 척 센 척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 자연스럽게”     


사실 나는 알게 모르게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른들에 대한 불신은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고 나도 모르게 방어적으로, 가끔은 적대적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었다. 

그저 상처받기 싫어서. 두렵고 무서워서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나는 어른들만 탓하고 있었다. 언니처럼 세상에는 착한 어른들도 많은데.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언니가 내 마음을 들여다봐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언니의 말에는  나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어서 너무 따뜻했고 뜨거웠다.

어쩌다 내가 상처투성이 응석받이처럼 까칠하게 살고 있었을까! 

알고 보면 난 착하고 여린 사람이었구나! 

언니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날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살아야 할지 밤새도록 고민했다.

나는 아직도 어른으로 다 자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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