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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3. 2022

괴로움 끝에 찾아온 건 낯선 외로움

위로받지 못한 상처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다. 

오늘도 학교 갈 차비가 없어서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옆 집에 이천 원을 빌리러 가셨다. 온 집안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아무리 저금통을 뒤져봐도 고작 차비 이천 원이 없었다. 

분명 어젯밤에 엄마가 삼천 원이 있으니 내일 차비는 걱정 말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새벽에 아빠가 그 삼천 원을 들고 몰래 술을 마시고 오셨단다.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이른 아침부터 옆집에 돈을 빌려야 하는 엄마 심정은 어떨까 싶어 그냥 꾹 참는다. 

그런데 옆집에서도 돈을 빌리지 못한 엄마는 일단 십 원짜리 저금통을 털어 겨우 천 원을 쥐어주신다. 그리고는 올 때 차비는 친구나 선생님에게 빌려보란다. 

어제도 친구에게 천 원을 빌려 못 갚고 있고 선생님에게도 이미 여러 번 사정한 터였다. 

차라리 걸어서 가는 게 낫겠다 싶은 심정이지만 워낙 시골이라 버스로도 1시간 거리이니 그러지도 못한다. 아침마다 차비 몇 천 원에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고 비참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발레수업 시간에 8천 원짜리 발레슈즈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종종 빌렸지만 1년 내내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절대 사주지 않았다. 무슨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 뭐가 그리 비싸냐며 하루 종일 쥐 잡듯이 잡았다. 결국은 돈이 없어서 못 사주는 건데 쓸데없이 학교에서 사 오라고 하는 거다, 막상 사면 별 필요 없다, 너무 비싸다, 그거 없어도 다른 애들은 공부만 잘한다, 네가 가격을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갖가지 이유로 돈을 안 줬다. 

준비물 하나 사기 위해서 싹싹 빌어야 했고 꼭 사가야 하는 거면 울면서까지 매일 빌었다. 진로, 꿈, 외모, 공부에 한창 관심 가져야 할 때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차비 걱정에 준비물 걱정에 너무너무 스트레스였다. 

하루하루가 너무 전쟁 같아서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다녀야 하나? 

옆 반 친구는 학교가 다니기 싫고 집에도 들어가기 싫어서 며칠 전 가출을 했다. 그 친구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에게 같이 이 지옥에서 벗어나자고 했을 때 나도 용기를 냈어야 했을까? 

아빠는 변변한 직업도 없었고 꾸준히 일을 하지도 않았다. 

엄마 역시 생활력이 없었고 늘 세상에 대한 원망만 할 뿐 언제나 강하지 못했다. 

당장 부엌의 쌀보다는 술, 담배가 떨어져야 겨우 일을 나가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부모님.

나는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데 엄마 아빠의 담배와 술은 줄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맞는 것보다 가난이 더 싫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맞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무능이었고 가난이었다.

배고픔이었고 비참함이었다.    

      

 청소년기가 되면서부터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우리 집이 정상적인 가정환경이 아니라는 사실과 내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가 가해자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혹시라도 이런 사실을 친구들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일부러 까칠한 척 대했고 가끔은 날이 선 채 친구들을 경계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마음 한 켠에서는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고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주었으면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모여있으면 밝은 척, 행복한 척 애써 웃으려고도 했다. 

털어놓고 싶다는 애타는 마음과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들어다 놨다. 그리고는 미치도록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수록 부모에 대한 원망은 커졌고 더 이상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믿었다. 

문득 ‘나는 왜 태어나자마자 불행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하루에 수십 번 감정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매일매일 부모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을 무렵, 학교 수업시간에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부모님 생각만 하면 분노부터 치밀어 올랐던 나는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이유 없이 때리는 무책임한 부모에게 편지라니.. 

반항심에 나는 단 한 자도 적지 않았다. 쓸 말도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우편으로 보낼 거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백지 그대로 봉투에 담아 꽁꽁 봉해버렸다. 

그런데 맙소사! 

그 수업은 마침 담임의 수업이었는데, 종례시간에 다시 그 편지를 각자 본인에게 나눠주시는 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일이 봉투를 열어 편지까지 하나하나 다 읽어보셨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일이 학생 이름을 호명하면서 정성스레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돌려주셨다. 

그때부터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사고 한번 친 적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으니 별일 없겠지 내심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이름은 마지막으로 호명되었다. 

선생님은 대놓고     


‘너 같은 년은 처음 봐, 어떻게 백지 낼 생각을 하니? 이거 아주 맹랑하네 진짜’

‘어디서 싸가지없게 이런 짓을 해? 못 배웠다고 자랑해 지금? 너 지금 당장 부모님한테 편지 4장 다 채우고 가. 너 다 쓸 때까지 여기 있는 애들 다 집에 못 가니까 그런 줄 알아’     


참 나쁜 선생님이다. 어버이날 편지인데 백지를 보셨으니 기가 막혔을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평소 말썽 한 번 피운 적 없고 조용하던 아이였는데 한 번쯤은 왜 그랬는지 물어보실 수 있지 않았을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인데 한 번쯤은... 정말 딱 한 번쯤은... 내 얘기를 들어보실 수는 없었을까? 궁금하진 않으셨을까? 난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 아이들의 야유와 원망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수십 개의 매서운 눈초리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나는 딱 한 번의 반항으로 대놓고 반에서 왕따가 되었다.

왕따 주동자는 담임선생님인 셈이다.


 괴로움 끝에 찾아온 것은 기나긴 외로움이었다. 

나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날 줄 몰랐다.

이 시련을 견디면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왕따가 된 이후 나는 더욱 존재감 없는 아이가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나는 그저 '싸가지없는' 아이'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이 올라도 아무도 잘했다고 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기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점심도 혼자 먹었다. 매일 반찬이 김치 아니면 아빠가 먹다 남은 생선조각이라 사실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는 것도 창피하고 미안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마저도 없어서 매점 구석에서 혼자 라면을 사 먹는 날도 많았다. 

주말에는 알바를 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 시작했다.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학교 준비물도 좀 사고 화장품이랑 머리핀도 좀 샀다. 내가 번 돈으로 사니까 아빠의 잔소리도 없었다.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알바는 많지 않았는데 주로 도시락 포장, 마트, 식당 서빙 알바가 주였다. 웬만한 알바는 다 해봤지만 그중에서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꽤 오래 일했다. 알감자 판매대에서 일했을 때는 손님에게 알감자를 너무 많이 담아준다고 혼이 났다. 그래서 딱 정량만 담아줄 수 있는 호두과자 코너로 바꿨는데 거기서도 양을 많이 준다고 혼이 나서 결국은 기사식당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뷔페식이라 많이 준다고 혼날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그때는 먹는 것에 인색한 것이 지겨워서인지 가득가득 음식이 담겨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혼이 나든 일이 고되든 내 손으로 돈을 버는 게 너무 뿌듯했다. 

하루 10시간 일해봐야 2만 원 남짓 손에 쥐어졌지만 그 돈이면 내 일주일 용돈보다도 많은 액수라서 월급날마다 설레고 흥분됐다. 

가장 먼저 제일 필요했던 화장품과 속옷을 샀다. 그때까지 엄마 화장품과 엄마 속옷을 아무렇게나 쓰고 입었는데 이제 내 속옷과 화장품이 생긴 것이다. 너무 기뻤지만 집에서는 티 내지 않았다. 

동생이랑 몰래 분식도 사 먹었다. 일부러 들키지 않으려고 옆동네까지 가서 사 먹었다. 

당시 좋아하던 젝스키스, 신화 오빠들의 CD도 살 수 있었고 옷이랑 신발도 가끔 샀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 아침 준비물과 차비 걱정을 덜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잘한 준비물과 학용품은 알아서 준비했고 가끔 친구들과 노래방이나 분식집도 갈 수 있었다. 

내가 알바로 용돈을 충당할수록 아빠는 더 일을 안 하시는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다. 

비참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매일매일 조금씩 발랄한 여고생이 되어가는 것 같다. 친구들과는 여전히 소원하지만 억지도 웃고 떠들지 않아도 되고 까칠한 척하지 않아도 되니 나름 다닐만했다. 겉돌기는 하지만 이렇다 할 사건 사고 없이, 같은 처지의 친구들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나름 꿋꿋하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이제 친구들처럼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아동학대가 참 불행한 것은 점점 성인이 되어 가면서 그 피해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를 인지하기 시작할 때쯤은 대부분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불신’ ‘분노’ ‘절망’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형성되고 그것은 피해의식, 자격지심 같은 성격의 한 부정적인 부분이 된다. 불행하게도 나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남은 인생마저 좀먹기 시작한다. 정말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당장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아동학대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도 모르는 사이에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에 꼭 이후의 치료가 절실하다.

가정폭력에 노출되다 성인이 되어 자연스럽게 폭력에서 벗어난 경우에도 절대로 악몽이 끝난 것이 아니다. 성인이라도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치유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악몽에서, 마음의 상처에서 벗어나 치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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