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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Oct 02. 2020

국내 문학 분야에도 기획이 있나요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16

오랜만에 국내 소설을 마감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 인쇄 감리까지 마치고자 지난 2주간은 또 정신없이 바빴다. 동시 진행이어서 3교까지는 외주 선생님께 맡겨두었다가, 크로스교, OK교 두 번을 보았다. 마지막까지 작가님과 열심히 상의를 하고, 최종 수정을 마치고, 인쇄!


매번 마감을 잘 해치우는 것 같아 보여도, 실은 매 마감마다 고비다. 이번에는 뇌 속에 물이 넘실대는 듯 어지럼증이 좀 일었다. 병원에 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봤지만, 연휴 때 죽은 듯이 15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말끔해졌다. 뒷목에서 뒷통수로 이어지는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열이 났는데 쏙 들어갔다(마사지 받으러 가면 뒷통수에다 안마사 선생님의 팔 바깥쪽을 대고 빨래 비비듯이 박박 비벼주는 곳인데 아찔하게 아프면서도 끝나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그 부위다). 정말 놀라운 인체의 신비. 그만큼 마감이 주는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정직한 몸을 보면 안다.


그럼에도 이번 소설 작업은 무척 즐거웠다. 우선 정미진 작가님과의 특별한 인연부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출판사 엣눈북스를 운영하고 계시면서 자신의 소설 작업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쓰는 사람.


나는 정미진 작가님을 전작 『누구나 다 아는, 아무도 모르는』(엣눈북스, 2017)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야기에 흠뻑 빠진 뒤, 변영근 일러스트레이터님과 함께 북토크를 한다고 해서 성산동 작은 카페 컴플렉스를 찾았다(이쯤 되면 기획의 노하우가 ‘작가와의 만남’이 아닐지. 무엇이든 좋은 걸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사람이 됩시다).


변영근 작가님의 원화들이 벽에 가득 걸려 있던 따뜻한 공간에서 정미진 작가님이자 대표님을 처음 보았고, 엣눈북스의 디자이너 권으뜸 님도 함께 독자들과 인사를 했다. 엣눈북스의 시작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월세 보증금을 빼고 무턱대고 출판사를 차리고, 시나리오작가에서 그림책출판사 대표가 되기까지. 또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기까지.


읽는 내내 소름이 끼쳐서 멈추고 또 다시 펼치고를 반복했던 『누구나 다 아는, 아무도 모르는』은 작가님이 10년 동안 아끼던 이야기였고, 그만큼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님 셋이 “우리 같이 포트폴리오에 들어갈 작품 하나 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공동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그날의 은근한 조명과 손에 쥐고 있던 커피의 온도,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지금 기억에도 무척 따스한 자리였다(아, 그 자리에 오래 알고 지낸 수명언니 & 명곤이도 우연히 마주치고 그랬지. 지금 적다 보니 떠오른 기억. 후후.)


행사가 끝난 후 왠지 쑥스러워 인사를 나누지 못했는데, 트위터에 남긴 후기를 보고 정미진 작가님도 나를 기억해주었고, 2018년 국제도서전 엣눈북스 부스에서 불쑥 용기를 내 인사를 했다. 반갑게 맞아주시고 인사를 해주셔서 같이 있던 후배 앞에서 어깨가 조금은 올라갔었는데. ㅎㅎ


그러고는 한참 트위터와 인스타로만 작가님의 소식을 접했다. 외국으로 나가 계신 듯했는데 암스테르담이었다가 프라하였다가 했다. 풍경 사진들을 보며 잘 지내시는구나 했고 엣눈북스에서 신간이 나올 때면 책 소개를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어떤 결심이 서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기꺼이 돌리고 밀어붙이는 사람, 정미진 작가님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랬다.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을 한 지 몇 달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기획회의를 통해 새로운 색깔을 가진 소설을 찾아보자는 이야기가 공유되었다. 이미 문학을 잘하고 있는 출판사가 형제(?) 회사인 만큼, 우리는 연령층을 보다 낮게 혹은 영상 등 다른 매체로의 접근이 쉬운, 그러니까 모든 출판사 대표님들이 좋아하는 OSMU 작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였다(나 왜 이 이야기를, 10년째 듣고 있는 거 같지). 아무튼 새로운 라인업이 필요한 회사이다 보니 시리즈의 한 기획으로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어디서부터 찾을지 차차 생각해보자고 했던 그날 바로 인스타그램 메시지가 왔다. 다름 아닌 정미진 작가님으로부터.


“엣눈북스에서는 그림책만 내고, 소설은 다른 출판사에서 내볼까 해서요. 살펴봐주실 수 있을까요? 부족한 글이지만 한 번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막 퇴근해서 아파트 단지를 들어서던 길이었다. 안 그래도 오늘 막 어떤 작품을 찾아야 할까 시작해보자 했는데 이렇게 때마침 귀한 원고를 주신다고 하니, 이것은 운명이었다. 놓치면 안 된다.


그 다음 날 나는 작가님의 원고를 받자마자 팀 내에 함께 공유하며, 다음 기획회의 전까지 읽어보고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리고 소설 원고를 열어보았는데 앗, 그간 보여주셨던 스릴러 장르가 아니다. 짐작과 달라 조금 당황했던 것도 잠시, 생애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각기 다른 이국의 도시에서 다양한 일들을 겪는데…… 무척 재밌다. 출간할 만하다.

그런데…… 나만 재밌으면 어쩌지.


좋은 원고를 읽고 나면 좋은 만큼 두려워진다. 설득해야 할 사람들이 다수면 아무래도 진이 빠지는데…… 그런 괜한 두려움을 안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재택근무로 인해 화상으로 팀원들을 만났다. 회의의 결론은? 대성공. 초고인 만큼 소소한 수정에 대한 피드백을 드리는 정도로 만장일치로 출간 의견이 나왔고, 기획안을 보완하여 다음 주 대표님과 함께하는 회의에서도 별 이견 없이 통과되었다.


팀원들의 피드백 의견을 모은 뒤, 담당 편집자인 내가 봐서 아닌 부분은 빼고, 작가님께 퇴고 의견을 최종적으로 드렸다. 퇴고 의견은 늘 조심스럽다. 작품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보다 작가님 본인이 가장 깊고 넓다. 그럼에도 독자들을 만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시간. 퇴고의 산은 거칠고 자칫 작가님의 의욕을 꺾기기 쉬우니(내가 왜 이런 형편없는 이야기를 쓴 거죠), 제3자의 눈으로 작품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건넨다.


편집자의 의견이 정답도 아니다, 다만 독자들이 가질 만한 비판의 지점을 출간 이전에 충분히 해소해보자는 의도를 담아. 작품 속에 푹 빠져 있는 작가님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부분들을 콕콕 짚어주면서.


물론 타인의 의견을 모두 다 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개중에는 잘못짚은 의견, 부당한 의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의견이든 그것이 제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뭔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견은 당신의 머리를 조금씩 냉각시켜 적절한 온도로 이끌어줍니다. 그들의 의견이란 즉 세상 사람들의 의견이고, 당신의 책을 읽는 건 결국 세상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당신을 무시할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로서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세상 사람들과 어느 정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아마도 대부분은 그렇겠지요) 당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정점'을 하나든 둘이든 주위에 확보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정점이 정직하고 솔직하게 독후감을 말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얘기겠지요. 설령 비판을 받을 때마다 불끈 화가 나더라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62~163쪽, 무라카미 하루키



한 달 후 작가님은 그전보다 훨씬 쫀쫀해진 이야기를 주셨고, 그때부터 요이땅 출간 작업은 시작되었다. 이제 연휴 끝나면 새 책으로 손에 쥐어질 예정이다.


국내소설을 마지막으로 작업한 것이 딱 1년 전, 이랑 작가님의 이야기책 『오리 이름 정하기』였다. 아주 오랜만에 소설 교정을 보면서 예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8년 전이었나, 맨 처음 국내문학팀에 들어가서 소설 원고를 교정봐야 할 때도, 나의 선생님은 외주 프리랜서 편집자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대조를 보면서 문장 수정을 어떻게 했는지, 교정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곤 했다.


소설가는 대부분 문장 하나를, 단어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기 때문에 편집자가 수정한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소설을 쓰면서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문장이 아닌 것은 낯설게 보인다. 그런 부분을 함부로 수정했다고 느껴지면 협업은 어그러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른 분야의 책보다 교정교열을 좀 더 세심하게 들어간다. 하나의 수정에도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설명을 다는 편이다. 그럼에도 최종 판단은 작가의 몫이기에 편집자의 수정 표시는 하나의 의견임을 분명히 한다. 드릴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게 드리면서 최종 판단을 좀 더 나은 쪽으로 하도록 돕는 것, 그런 자세로 문학 작품을 편집한다.


문학 편집자 시절, 사전을 만드는 높은 어른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단 한 번뿐인 식사 자리였는데 그 분은 그 해에 출간되는 소설을 가지고 어휘 수집을 한다고 했다. 그 순간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내가 만들고 있는 책에 ‘한글’의 의미를 퇴색시키거나 오용하는 사례가 없는지 순간 마음이 덜컥 했던 것이다. 그 후로 특히나 소설의 경우, 작가님이 쓰는 말이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 속 뜻과 일치하는지, 더 명확한 표현으로 대체할 만한 단어가 있는지 등 사전적 정의를 1차적으로 확인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어도 모두가 잘못 쓰는 말도 있어 놀라기도 하고 어색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색한 건 우리가 그렇게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일 뿐. 바른 말을 써서 후대에 알리는 것, 있는 단어를 굳이 사어로 만들지 않는 것도 편집자의 작은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국내문학의 경우에도 기획이 필요한가, 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앞서 이야기한 정미진 작가님의 경우처럼 완성된 원고 상태로 편집자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내문학의 편집자인 경우, 숙련된 교정교열 편집자만 필요한 것 아닌가 오해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부분도 편집자가 하는 고난이도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초고에 완성도를 높이고자 작품을 읽고 개연성이나 구성, 독자가 읽고 난 후에 조금이라도 갸웃거리지 않게끔 미리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는 것도 기획이다. 원고 파악을 위해서는 비전공자라 할지라도 평소 문학 분야를 많이 읽어두고 또 작품 해설도 읽어두는 편이 많은 도움이 된다. 또 원고를 읽고 난 이후, 문학독자 중에서도 어떤 관심사를 둔 독자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갈 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시작해 책의 카피 작성부터 작품의 분위기를 담은 디자인 의뢰도 편집자가 하는 기획의 영역이다.


이번 정미진 작가님의 소설은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들 속 주인공이 있는 결정적 장면을 본문 삽화로, 표지는 생애 첫 해외여행을 출발하는 공간이자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의 직장인 공항으로 배경을 잡고 싶었다. 작가님과 의논해 늘 환상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최지욱 작가님을 섭외했고(다행히 일정이 맞아 쉽게 섭외가 되었다. 이 인연도 참 타이밍이었다. 감사합니다) 결과물은? 대만족이다. 어서 독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다(매우 흐뭇).


그렇게 컨셉을 잡다 보니 소설의 제목도 해외여행이 쉽지 않은 이 시기의 독자들이 대리만족 겸 여행의 감각을 되살리고 낯선 곳을 헤매며 느꼈던 해방감과 자유로움, 설렘을 담고 싶었다.

그렇게 탄생한 제목은 바로바로!     

 

자, 여러분,

그러면 10월 2주에 서점에서 만나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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