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과학 이야기
어느 날 전 세계 12곳에 외계인의 물체가 나타난다. 난데없이 나타난 외계 물체의 의도를 모르는 각국 정부는 정보를 통제하고 전문가를 동원하여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와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 분)은 한 팀을 이루어 외계인과 접촉한다.
18시간마다 한 번씩 열리는 문을 통해 외계인을 만나는데 그들은 7개의 다리와 눈을 가진 앞뒤와 좌우가 불분명하여 이를 헵타포드(그리스어로 7을 의미하는 헵타와 다리를 뜻하는 포드의 합성어)로 불리게 된다. 그들이 내는 소리라고는 ‘물을 뒤집어쓴 젖은 개가 후드득 몸을 흔들어 털가죽에서 물을 떨치는 소리’밖에는 없다. 의사소통은 진전이 없고 사회는 혼란 속에 휩싸인다.
음성언어를 포기하고 문자의 이해에 집중하는 루이스는 한 단어 한 단어씩 인간 언어를 보여주고 그에 해당하는 헵타포드의 문자를 배운다. 한편 외계인의 문자는 마치 서예의 초서체같이 붓에 먹을 묻혀 쓰는 것처럼 보인다. 지구상의 문자와는 달리 문장의 선후 순서가 없고 원형의 그래픽 같은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 학자들은 고심을 하게 된다. 의미는 갖지만 소리는 없는 의미표기(Semasiographic) 체계이다.
시간이 지나고 자료가 쌓이게 되자 어렴풋하게 외계인의 문자를 이해하게 된다. 외계어는 지구의 말과는 다리 선후의 순서가 따로 없고 동시에 서술된다. 이때 루이스에게는 모르는 아이의 환상이 계속 보인다. 한편 불확실한 외계 언어의 이해 속에 각국은 외계인의 언어를 오해하고 정부 간 협력을 끊고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외계언어를 이해할수록 외계인처럼 생각하게 되는 루이스는 점점 알 수 없는 느낌에 불안해하지만, 외계인의 언어에 능숙해지면서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생겼음을 인지하게 된다. 외계인처럼 시간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되고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면서 루이스는 예감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언어학에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이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이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해 가면서 점점 헵타포드처럼 생각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선형적인 관계가 아닌 순환적인 인식으로 바뀌게 된다. 영화에서는 중간중간에 미래의 아이가 등장하는 미래 회상(fresh forward) 장면으로 나타난다.
영화 <컨택트>(2017)는 우리말 제목을 잘못 지은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받고 있다. 영어 원제목은 Arrival인데 번역하면 도착, 도래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엉뚱하게 ‘컨택트’로 지어 혼란을 유발했다. 이 한글 제목은 이미 물리학자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Contact)>(1997)에서 사용됐다. 배급사는 제목이 비슷하다는 것을 기사를 보고 알았다니 외계인을 만난 것처럼 신기한 노릇이다.
<컨택트>는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엘리, 2016) 중 <네 인생 이야기(Story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테드 창은 브라운 대학에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소설가로 SF 계에서 이 시대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과학이론을 사실적,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설득력 있는 소설을 써 호평을 받고 있다.
영화에 옮겨지지 않은 소설의 내용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외계인들이 지구의 어떠한 이야기에도 반응하지 않지만, 딱 한 가지 이야기에만 반응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이야기가 바로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Fermat's principle of least time)’이다. 빛은 목적지까지 가는 여러 가상 경로 중에 가장 시간이 빠른 경로를 선택하여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빛이 공기에서 물로 들어가는 경우, 매질 간의 굴절률(또는 밀도) 차이로 경로(또는 속도)를 바꾸게 된다. 이는 우리가 흔히 보는 현상으로 물컵에 들어간 빨대가 굽어져 보이는 것, 물속의 동전이 보이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 또 물속의 고기를 작살로 잡을 때 아래쪽을 겨냥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페르마는 이 원리의 정의에 목적론적으로 최소 시간이라는 이름을 넣었다는 점이다. 이성이 없는 빛이 어떻게 목적지를 알고 마치 먼저 가본 것처럼 최소 시간이 걸리는 줄 알고 그 경로를 선택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물리 법칙의 일반적인 공식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데 이 법칙은 함목적적이고 목적론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나중에 하위헌스의 증명을 통해 목적론적 어휘는 사라지게 된다. 빛이 이동하는 최소 시간 경로를 택하려면 이것은 미분이 필요하고 게다가 변분법(變分法, calculus of variations)이라는 특별한 미분으로 구해진다. 그리고 빛은 한번 떠나면 도중에 경로를 바꾸지 못한다. 알고 있는 미래를 받아들이고 따라간다고 할까?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7~1665)는 변호사이자 공무원으로 혼란스러운 17세기 프랑스에서 평생을 풍족하게 잘 산 사람이다. 단지 수학은 취미 삼아 했고 미적분학에 이용되는 각종 방법을 창안했으며 현재 정수론의 창시자로도 알려졌다. 뉴턴도 페르마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아 미분법을 완성했다. 아마추어지만 전문가를 골려 먹는 게 취미여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그의 사후 수백 년 동안 수학자들을 골탕 먹였다. 그는 마지막 정리를 언급하면서 “나는 경이적인 방법으로 이를 증명했으나 여백이 부족하여 여기 적지 않는다”라고 남긴 짓궂은 수학자로 유명하다.
원작의 마지막에 루이스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하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좋은 영화는 각본(또는 원전),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 배우들의 연기가 잘 어우러져야 나온다. 종묘제례악 같은 요한 요한슨의 음악은 외계인의 도착을 알리는 장중한 분위기를 만든다. 주연인 에이미 아담스의 뛰어난 연기가 작품의 분위기를 잘 이끌고 있다.
사실 <컨택트>는 처음에 봉준호 감독에게 의뢰가 들어왔을 정도로 드니 발뢰브(Denis Villeneuve) 감독과 봉 감독은 비슷한 성향과 명성이 있다. 발뢰브 감독은 영화 <시카리오>(2015)로 성공적인 할리우드 입성을 했고, 이후 SF 마니아의 열광작품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비롯하여 <듄>(2021)에서 메가폰을 잡았다. 올해에도 <듄: 파트 2>가 개봉됐다. 발뢰브 감독의 경이로운 영화 세계를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이 부족하여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
<이 글은 한국원자력 연구원 원우에 실린 원고에 약간의 수정을 한 글입니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