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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Jun 06. 2024

안성의 숨은 보물, 굴암사 마애불

문화재 지구과학

안성은 경기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및 평택제천고속도로가 있는 교통의 요지인데, 오래전부터 충청, 경상도의 물자와 사람이 모이던 곳이었다. 그래서 안성장은 조선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꼽혔다. 안성의 동북쪽은 400~500m 정도의 산지, 남서쪽은 안성평야와 100~200m 정도의 산지가 있는 동고서저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안성의 암석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심부가 화강암 분지여서 여기를 안성천이 흐르고 논이 많아 교통의 요지로 발전했다. 고삼 호수와 금광 호수 등 제법 큰 호수도 많고 저수지도 많이 있어 농업 중심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수도권과의 어중간한 거리 때문에 오히려 발전이 더딘 지역이기도 하다. 고속철도도 비껴가고 일반철도도 없어 철도의 외지이다.


화강암이 산지를 이루는 지역을 중심으로 석조문화유적이 다수 분포한다. 사찰로는 칠장사, 석남사, 청룡사 등이 현존하고 죽산에 폐사지인 봉업사지가 있다.


굴암사



안성시 대덕면에 위치한 굴암사는 한때는 대한불교 법상종 소속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998년(다른 자료는 1017년)에 개산 되었다는 것만 확인될 뿐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존하는 2구의 마애 여래불상 등의 유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때 창건된 사찰로 보인다. 대웅전 미륵전과 요사채가 있으나 현대에 지어진 것이다.


절의 입구로 들어서면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마치 손오공이 방금 깨고 나온 듯한 바위의 절단면을 따라 계단이 놓여 있고 위로 오르면 마애불들이 새겨져 있다.



안성 굴암사 마애 약사여래좌상, ⓒ 전영식

첫 번째로 돌계단의 왼편에는 보호각을 쓴 마애 약사여래좌상이 나온다. 특이하게 마애불에 호분을 칠해 놓았다. 소발 머리에 두툼한 육계, 전법륜인을 한 모습의 3.54m 크기의 거불이다. 육계는 붉은색, 소발은 검은색으로 칠했고 눈썹과 수염을 녹색으로 그려 넣었다. 큼직한 이목구비와 푸근하지는 않지만 엄숙한 얼굴이 인상적이다.  


오른손은 전법륜인으로 왼손에는 약함으로 보이는 원형지물을 들고 있다. 비례도 좋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언제 누가 왜 하얀 호분을 칠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성 굴암사 마애 선각여래불좌상, ⓒ 전영식


마애 약사여래좌상에서 다시 바위 사이 통로를 통과하면 보호각 아래 마애 선각여래불좌상이 있다. 바위의 절리가 심하고 암석의 입도가 커서 제법 큼직한 반정이 곳곳에 보인다. 심지어 아래편에는 약 15cm의 페그마타이트 맥까지 지나가고 있다. 주변 암석에도 동일한 맥이 관찰된다. 오른손 부분에는 검은색의 염기성 포획암까지 있어 마애불을 만들기 좋은 조건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상체의 마멸이 심한 편이어서 디테일한 모습을 관찰하기는 어렵다. 암석에 양각한 것은 아니고 선을 파서 만든 선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체로 후덕한 상호와 두툼한 육계, 삼도와 통견의 정도는 일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수인은 마멸되어 확실치가 않다. 호분칠 한 것이 모두 떨어져 나가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있다. 높이는 4.17m이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서울의 백불


간혹 호분을 칠한 백불을 만나볼 수 있다. 아래쪽의 사진이 서울에 있는 두 개의 호분칠된 마애불인데 왼쪽은 보도각 백불로 알려진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고 오른쪽은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은 상명대에서 홍제천을 따라 500여 m를 내려오면 천변의 보도각(普渡閣, 피안의 세계로 넓게 건너가는 배를 의미(저자주))에 모셔져 있다. 비대칭으로 뚫린 차양을 빼꼼히 내다보는 보살님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진다. 높이 5m에 달하는 고려시대 관음보살상인데 호분과 금분으로 장식되어 있다. 머리에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이 씌워져 있다. 마애불의 뒤편에는 화강암 바위가 여러 개 흩어져 있다. 암석은 절벽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굴러떨어져 내려온 바위에 양각되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이 마애불 앞에서 기원을 했다고 하고, 고종의 어머니도 아들을 위해 축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좌)과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전영식


고려대학교 뒤편의 개운사 옆 보타사에 있는 마애보살좌상은 옥천암 것에 비해 화려함은 덜 하지만 비슷한 크기(5m)의 고려시대 돋을새김 마애불이다. 역시 화강암에 새겨졌는데 머리에 특징적인 보관이 씌워져 있다. 통견의의 법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역시 호분이 칠해져 있는데 옥천암의 것이 두터운 화장이라면 보타사의 화장은 한 듯 안 한듯한 자연스러운 화장이라 할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 칠, 눈과 눈썹에 검은 칠이 되어 있다.


개운사는 1396년(태조 5년)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원래는 영도사였으나 1779년(정조 3년) 홍빈의 묘인 명인원((明仁園)이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에 조성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개운사는 박한영과 탄허가 주석하고 강의하며 역경 사업을 펼친 곳이다. 예전에 조계종 총무원이었고 중앙 승가 대학이 있었다. 당시에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불이 있는 이유


호분(胡粉)은 오랫동안 풍화시킨 굴과 같은 조개류의 껍질을 부수어 만든 안료이다. 탄산칼슘이 주성분이다. 곱게 갈수록 편안한 화면이 만들어진다. 아교 등과 같이 섞어 사용한다. 화분을 사용하는 이유는 화장할 때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이유와 같다. 표면을 매끄럽게 보이게 하고 그 위에 색조 화장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서다.


암석은 그 생성 환경에 따라 입자의 크기가 다르다. 화성암의 경우 심성암은 입자가 크고 분출암의 경우에는 입자가 작다. 조각하는 입장에서는 입자가 작은 것이 유리한데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석 입자인 광물의 크기보다 작게 선을 세길수는 없다. 입자가 떨어져 나오면 선은 불명확해지고 정밀한 그림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설령 어찌어찌 그렸다고 해도 풍화작용을 겪으면서 광물이 떨어져 나와 선각은 평평해지고 디테일은 사라진다. 우리 선조들도 이것을 잘 알았다. 아니면 그 한계를 지키지 못한 석조유물은 모두 사라져 우리 앞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세밀한 조직의 암석은 석공에게 좋은 재료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석공의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큰 도전이다. 창피한 실력이 후세에 길이 남게 되니까 말이다.


굴암사 화강암과 페그마타이트 맥(렌즈 캡 직경 6cm), ⓒ 전영식


굴암사의 경우 위와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암석 조건이 마애불을 기기에 꽝이다. 암석이 갈라진 절리나 하얗게 화면을 가르는 페그마타이트 맥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광물의 입자크기가 문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암석의 표면에는 각설탕 크기의 석영 반정이 박혀있다. 풍화가 진행될수록 장석류는 탈락하고 석영 반정만 남게 된다. 우리가 선각여래좌상에서 보듯이 어느 정도 풍화가 진행되면 그림의 세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결국 마애불을 기기 전의 바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마애불 모습을 지키기 위해 그 위에 호분을 칠하고 색상을 넣어 그리는 것으로 그 이미지를 나타내주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아가씨보다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는 화장과 같다고 할까. 호분을 칠한 상태로 봤을 때 원본 암석의 풍화가 제법 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굴암사 화강암의 표면 ⓒ 전영식


호분은 비싸고 넓은 면적을 두텁게 칠해야 하므로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 위에 그림도 그리려고 하면 석공이 아니라 화공이 필요하다. 그래서 큰 시주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보수하기 힘들다. 우리는 결국  석공이 세긴 최초의 모습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후에 화공에 의해 재탄생된 마애불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웅전 앞 연못가에 가져다 놓은 청동 삼산관 반가사유상이 어떻하면 마애불을 잘 보살피고 꾸밀 수 있을지 오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안성 골암사 대웅전 앞 반가사유상, ⓒ 전영식


굴암사는 크고 유명한 절은 아니지만 선각과 조각 마애불이 한자리에 있는 고즈넉한 사찰이다. 또한 지질학자의 시각에서는 화강암의 풍화현상, 절리, 페그마타이트, 포획암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조사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들 인생도 생로병사를 거치지만 마애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마애불이 자연의 섭리인 풍화작용으로 사라져 갔을지는 부처님만 아실 듯하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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