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 지구과학
지금은 필기구로 무언가를 쓰는 일도 거의 없지만, 예전에 학교를 들어갈 때면 먼저 준비하던 것이 연필이었다. 잘 깎은 연필에 잘 벼린 연필심은 얼른 학교를 가서 필기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했다. 연필을 깎을 때 나는 나무 깎는 느낌과 심을 벼릴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도공처럼 나를 숭고하게 하고 엄숙한 마음을 갖게 했다면 너무 과장인가. 함께 올라오는 나무향은 언제든지 맡아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연필(鉛筆, Pencil)은 인류가 만든 발명품 중 가장 최고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연필이 없던 세상에서는 잉크통(동양은 먹물통)을 들고 다녀야 했고 쏟기 일쑤여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또 한번 써놓으면 다시는 고칠 수가 없으니 글 쓰는 작업이 피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필은 가볍고 값도 쌌으며* 친환경적이다. IKEA에 가면 지금도 메모용 연필을 주는데 아주 근사한 아이디어다(제품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
* 물론 비싼 것도 있다. 그라프 폰 파버카스텔의 Perfect Pencil은 자루당 30~50만 원이다.
가요 가사 중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게 있고, 일설에 따르면 작고하신 재벌그룹의 회장님은 연필로 결재를 하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다시 지우개로 지우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우주개발 초기 NASA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우주 펜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구소련은 그딴 짓을 안 하고 연필(사실은 크레용)을 사용했다고 한다. 볼펜의 잉크는 무중력상태에서 지표면처럼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두 나라는 연필 사용을 포기했는데, 이는 연필 조각이나 부러진 흑연심이 기기를 오작동하게 할 수도 있는데다가 흑연은 전도체이기 때문이었다.
연필은 원통형이나 다각기둥 모양의 나무의 중심에 흑연을 끼워 만든 필기도구를 말한다. 연(鉛)은 납(Lead)을 의미하는데, 흑연 발견 당시에 이를 일종의 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흑연은 납이 아니다. 그랬다면 연필심에 침 묻혀 쓰던 친구들은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 거다. 보통 육각형, 원형이 많이 쓰이는데, 다른 형태는 연필을 잡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연필은 16세기 영국 보로데일(Borrodale) 광산에서 질 좋은 흑연이 발견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흑연의 인기는 대단해서 퇴근하는 광부들의 몸수색, 공급량 조절을 위한 계획적 폐쇄, 도굴방지법 등이 생겨났다. 당시에는 흑연 덩어리를 나무에 묶어 썼는데 점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개선됐다. 18세기에 들어 국제관계 악화로 좋은 흑연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의 화학자 니콜라 자크 콩테(1765~1805)**가 흑연분말과 점토를 혼합한 후 구워 심을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모습처럼 끝까지 심이 꽉 차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 지금도 미술에서 사용하는 콩테(Conte)가 그가 개발한 것이다.
연필은 영국에서 개발되고 프랑스에서 개량됐지만, 현재 유명한 연필회사 두 곳은 독일 회사이다.
스테들러(STEADTLER)는 목공기술자였던 프리드리히 스테들러(Friedrich Steadtler)가 흑연을 다루는 기술을 접목하면서 1706년 연필 장인으로 인정받았다.
파버 카스텔(FABER CASTELL)은 카스파 파버(Kaspar Faber)가 1760년 뉘른베르크 근처 슈타인에서 만들며 시작되었다. 1846년 장 피에르 알리베르(Jean Pierre Alibert)가 시베리아 동부에서 질 좋은 흑연을 발견했고, 1856년 이 흑연의 독점 구입권을 파버 카스텔에게 판매한다. 6년 후 시베리아산 흑연으로 된 연필을 출시했고 큰 성공을 거두웠다. 이때 파버 카스텔은 직원들의 이직을 통한 기업비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연금, 주거, 육아, 편의시설 등 파격적인 복지 정책을 실시한다.
헨리 페트로스키에 따르면 당시 파버 카스텔은 러시아 흑연을 강조하기 위해 동양(또는 동양왕족)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연필외장을 만들었는데, 이 코이누르 연필이 원조 노란 연필(Original Yellow Pencil)로 선정되면서 연필 하면 노란색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몽골(Mongol)이나 미카도(Mikado)라는 이름이 연필에 붙게 되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장 피에르 알리베르는 이름을 이반 페트로비치(Ivan Petrovich)로 바꾸고 니콜라스 1세 황제를 위해 모피수집, 광물채굴 등 일을 했다. 사금을 채취하던 알리베르는 팬(pan)에 흑연이 걸려 그 흑연의 원산지를 궁금해했다. 결국 바이칼호수에 인접한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사얀 산맥(Sayan Chain) 내의 험준한 산인 보토골(Botogol) 산 꼭대기에서 흑연을 발견했다(몽골 위쪽이다). 그는 보토골에서 채굴한 흑연을 순록의 등에 싣고 태평양 연안까지 운반했다고 한다. 이 광산은 1950년대까지 가행되었다.
탄소의 동소체(화학적 조성은 같지만 원자의 배열상태, 결합양식 등이 다른 것)로 분자구조가 6각의 판상형태로 되어 있고 판 사이가 반데르발스 결합(Van der Waals bond)으로 되어 있어 잘 미끄러지며 부서지는 광물이다. 모스 경도가 1.5로 활석과 석고 중간이다. 쉽게 부서진다는 이야기다.
산화적 환경에 노출되지 않고 접촉 변성 작용 또는 광역 변성 작용을 받아 생성된 사암, 셰일, 석탄, 석회암 등의 암석과 함께 산출될 수 있고, 환원성 환경에서 생성된 사문암, 석회암과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주로 편마암, 편암 등 변성암에서 발견된다.
승화점이 높아(3948K) 로켓의 엔진 내벽, 화학공정에 사용되고 전도성 때문에 2차 전지 등의 전극으로 사용된다. 기계 분야에서는 윤활유를 사용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감마제, 윤활제의 용도로 쓰인다(자동차 와이퍼에 흑연이 코팅된다). 또 순도 높은 흑연은 중성자 단면적인 낮아 원자로 감속재로 쓰인다.
광물학적으로 흑연에는 결정의 크기에 따라 눈으로 보이는 인상흑연(鱗狀黑鉛)과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토상흑연(土狀黑鉛)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인상흑연은 보통 변성퇴적암 중에 렌즈상으로 산재하는데 청평, 가평, 시흥, 공주, 곡성 지역에서 산출되고, 토상흑연은 석탄층이 강한 동력변성작용이나 화성암 관입 시에 열변성작용을 받아 생기며 문경, 상주, 영동 등에서 발견된다.
변성암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1905년경 경상북도 상주 및 함경남도 영흥에서 토상흑연이 처음으로 채광되고, 1907년경에 평안북도 용암포 부근에서 인상흑연이 처음으로 채광되었다. 흑연은 우리나라의 특수광물이며, 흑연광업은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었다. 1917년에는 흑연광업이 급격히 발전하여 가행된 광구수가 130여 개, 생산량이 1만 6000t에 이르렀다. 1933년에는 토상흑연 2만 740t, 인상흑연 1,937t을 산출하여 세계 제1위의 산출국이었다. 이제는 채산성이 떨어져 많이 생산하지 않고 수입에 의존한다.
경부선 철도의 중간지점인 황간역은 한때 흑연수송으로 활기를 띄었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팔음산(八音山)에는 토상 흑연광산이 있었는데 서쪽은 월명광산, 남쪽은 득수광산이었다. 이 지역의 지질은 퇴적암들이 배사구조를 이루고 있고, 양쪽 산사면에서 같은 광맥이 나타나 따로 광산이 있었던 것이다. 광층이 두꺼운 곳은 20m에 달했다고 한다.
1906년 일본인 고미야(小宮)가 개발하여 나가사키를 통해 독일로 수출됐다. 요즘도 남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됐지만, 우리는 벌써 세계대전에도 연관 됐었던 것이다. 1940년 조선토상흑연광업조합, 1941년 조선광업진흥회사에 흡수됐다. 1987년 연간 2만 8000톤가량을 생산하여 남한에서 가장 큰 광산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 융희 4년(1910)에 보면 ‘황간군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흑연을 채취하기 위하여 철도 간선을 부설하였다. 그것은 황간 서면에서 상주 득수면까지 33리의 거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주 득수리에서 월유봉을 지나 황간역까지 놓인 이 철도는 황간흑연채광선이라고 불렸는데 19.6km 길이를 소가 끌고 사람이 미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지금은 부지만 중간중간 확인되고 철길은 없다.
“내가 나의 글을 내 몸으로, 내 육체로 밀고 나간다는 확실한 느낌” [소설가 김훈이 연필 쓰기를 고집하는 이유]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연필로만 글쓰기를 하는 노작가 김훈은 누구보다 흑연을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영문학과를 중퇴하고 기자로 작가로 살아온 그가 어찌 판상구조 광물의 그 미세한 결합력에 끌렸는지는 모르겠다. 몸과 육체로 밀고 나가는데 연필만큼 가볍고 편리한 물건이 있을까(그렇다고 그의 글쓰기가 쉬웠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필부들은 세상 누구나 보다 큰 힘을 가지려 온갖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하고 무궁한 힘은 큰 힘에 있지 않고 작은 힘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압력보다 다정한 토닥거림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내일 아침에는 연필을 한 자루 깎아보아야겠다.
참고문헌
가이 필드, 연필의 힘, 더숲, 2017
나무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헨리 페트로스키, 연필, 서해문집, 2020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