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조선 시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이자 금석학, 천문학, 고증학 등에도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추사 본인은 록 내 글씨는 보잘것이 없더라도,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얼마나 먹을 갈아야 벼루의 밑창이 뚫렸을까? 김정희의 작품과 유물은 ‘김정희 종가 유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중에 운룡문(雲龍文)단계연(硯), 유명연(有銘硯), 도철문(饕餮文) 연의 3개의 벼루가 포함되어 있다. 유명연과 도철문연은 남포석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벼루는 문장가들의 필수품이자 품격을 나타내는 위세품이었다. 붓과 함께 마치 지금의 명품 만년필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안평대군의 벼루
세종이 당호를 내렸다는 안평대군의 비해당 자리, 수성동 기린교 너머에 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낭만의 귀공자였다. 얼굴도 잘 생겼고 글씨도 명필이었고 그림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에는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게다가 그림을 수집하길 좋아해서 조선왕조 첫 대수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안평대군이 발문을 쓰고 안견이 4일 만에 그리고 당대 문인 21명의 제시가 붙은 몽유도원도는 가장 유명하다.
안평대군은 벼루를 좋아하고 아꼈다. 그런데 눈치 빠른 안견은 세조가 왕권을 찬탈하면서 주변 인물을 정리한다는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안견은 안평대군의 방에서 귀한 벼루를 훔치는 척하다가 발각되는 해프닝을 만들어서 화가 난 안평대군에게 눈밖에 나게 된다. 그 덕에 안견은 안평대군을 둘러싼 숙정의 풍랑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계유정난으로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사사되었다. 그의 벼루는 전해지지 않는다.
석치 정철조
그로부터 300여 년이 흐른 뒤, 문인 중에 정철조(1730~1781)라는 분이 있었다. 47세에 분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벼슬을 지냈다. 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등과 교류하였다. 손재주가 비상하여 지도, 기계제작, 그림 등에 뛰어났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벼루 만드는 재주였다.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다가 돌만 보면 순식간에 벼루를 팠다. 이렇게 만든 벼루는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달라는 대로 주었다. 그의 호가 ‘석치(石癡)’이니 이는 ‘돌에 미친 바보’란 뜻이다.
박영철이 소장한 정철조의 벼루를 이한복이 그리고, 박영철이 설명문을 붙였다. 수경실 소장, 출처: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벼루는 당연히 장인들이 만드는 것이었으나 정언 벼슬까지 한 관리가 품격과 안목이 높은 벼루를 대량으로 그것도 순식간에 만드니 소문이 났다. 너도 나도 석치의 벼루를 갖고 싶어 했다. 유득공도 <기하실장단연가>에서 안동석, 남포석으로 만든 그의 벼루를 극찬했다. 당대 최고의 예술 감평자인 강세황도 자신이 본 천 여개의 벼루 중 석치의 것이 단연 으뜸이라고 평했다. 현재 석치의 것으로 알려진 벼루는 전해지지 않지만 이한복(1897~1940)의 그림에 남아 있다.
정철조는 고려시대 이후 답습되던 중국의 벼루 디자인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국화나 귀뚜라미 같은 문양을 넣어 벼루를 단순히 먹을 가는 도구가 아닌 멋진 예술품의 품격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돌의 본래 모양을 훼손하지 않고 살리는 방법으로 벼루를 조각하였다.
벼루
벼루는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기 위한 필사도구 중의 하나이다. 벼루, 먹, 붓, 종이의 문방사우 중 가장 으뜸이다. 황제 헌원(黃帝軒轅) 시대와 공자(BC551~BC479) 시대에 벼루가 존재했다고 전해지나 유물이 발견되는 것은 진시황제(BC259~BC210) 시절의 벼루가 처음이다. 편편한 돌 위에 묵을 가는 돌인 마묵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2200년이 넘었다. 벼루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것은 한나라(BC206~AD220) 때이다.
벼루는 재질에 따라 도자기와 천연석으로 나누고 이 밖에 옥, 상아, 동, 철, 나무, 옷 등으로도 만들어졌다. 그 용도에 따라서 실재 사용하는 실용연인지 장식용인 완상연 인지로 구분한다. 형태상 구분으로는 네모난 장방형이 대두분을 차지하나 원형이나 이형 벼루도 많다. 그리고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지에 따라 달과 매화가 조각되는 매월연, 용이 조각되면 용연, 소나무, 대나무, 매화가 조각되면 삼우연으로 불린다. 또 돌의 산지에 따라 단계연, 흡주연, 해주연, 남포연 등으로 불린다.
부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도자기 벼루, 출처: 국립부여박물관
우리나라의 벼루 유물은 이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야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원형 도연과 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제시대 금성산 출토 도자기 벼루가 그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 벼루의 원료 돌은 전국에 걸쳐 분포하는데, 정선, 평창, 장단, 단양, 계룡산, 남포, 안동, 경주, 언양, 장수, 강진, 해남 등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힌다. 이 중 충남 보령에서 나는 남포석을 가장 으뜸으로 친다.
남포석
남포 벼루 제작에 쓰이는 돌, 출처: 보령남포벼루와 문방가구
남포석은 보령시에 위치한 성주산(510m) 일대에서 채석되던 벼루 돌이다. 쥐라기 퇴적암인 남부남포층군 내에 분포하는 흑색셰일이다. 셰일은 혈암으로도 불리는데 주로 입자가 작은 진흙이 퇴적되어 쌓여서 굳어지는 퇴적암이다. 층리가 발달해 있다. 하나의 층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조층, 아미산층, 조계리층, 백운사층, 성주리층에서 산출되며 퇴적환경에 따라 석질이 다양하다. 최상품연석은 성주리 백운사 사찰 주변의 백운사층에서 나왔고 이를 백운상석이라고 일컫는다.
셰일의 성분 중 처트(chert)로 불리는 미립질의 석영이 고르게 분포하여야 먹이 곱게 잘 갈린다. 간혹 은사와 금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백운모와 흑운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조흔색이 각각 무색, 흰색이다. 당연히 흑운모와 백운모가 많으면 먹의 고유의 색깔이 나타나지 않는다.
남포석에 대한 정량분석 결과에 따르면 일반조암광물이 69%, 점토광물이 31% 정도로 나타나는데 다른 지역의 벼루돌보다 석영 함량은 높고 점토의 일종인 고령토 성분이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남포석은 석영의 함량이 높고 점토광물의 함량이 적은 좋은 벼루 돌이다.
암석의 물리적 성질로 보면 경도, 압축강도, 마모강도가 높아야 먹물이 쉽게 마르지 않고, 공극률이 낮아야 흡수율도 낮다. 흡수율이 낮으면 먹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경도가 약하면 먹과 돌이 함께 갈리게 되어 먹물이 탁해진다.
벼루와 비석을 만드는 석물공장은 예전에는 남포면, 웅천면, 미산면에 흩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웅천면에 모여 있다. 장항선을 타고 웅천역을 지나면 철도변으로 많은 석재 가공 공장을 볼 수 있다. 붓글씨가 이제 취미 수준으로 축소되면서 벼루를 만드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에 무상함이 느껴지는 것은 벼루뿐은 아닐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과학적 분석기기가 없이 어떻게 벼루 돌로 알맞은 암석의 찾아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많은 전문가와 장인의 경험이 세대와 세대 사이에 켜켜이 쌓여 왔을 것이다. 단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를 연구하지 못한 게으름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제라도 선조이 알고 있던 지질학에 대한 역사와 지식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