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7월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은 그 가치만큼이나 졸속발굴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큰 아픔이다. 선진국은 수년이 걸려서 발굴할 유적을 단 17시간 만에 아수라장 같은 현장에서 거의 도굴 수준으로 해치워 역사에 길이 남을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발굴책임자였던 서울대학교 김원룡박사마저도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큰 수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 고고학계의 발굴은 무령왕릉 발굴 이전과 그 후로 크게 나뉜다.
2년 뒤 백제에도 이런 게 나오는데 신라에는 없겠느냐는 주장이 나오면서 경주에서 제일 큰 황남대총에 대한 발굴 지시가 상부에서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에서 뭇매를 맞은 고고학계는 솔직히 고고학 발굴에는 기술이 없었고 따라서 실력도 키울 겸 시험 삼아 옆에 있는 작은 무덤인 155호분(일제는 기준 없이 신라고분군을 1~ 155호분까지 이름 붙였다)을 먼저 발굴했는데 여기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니 이게 천마총이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이 시작된 천마총은 금관, 금제 관모 등국보 4점과 보물6점을 포함하여 1만 1,526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천마총 발굴에서 힘을 얻은 발굴단은 98호분인 황남대총을 1973년 7월 6일부터 1975년 10월 8일까지 2년 3개월 동안 연인원 3만 2,800명을 투입하여발굴했는데첫해 7~8월 사이에만 1만 1,297점의 부장품을 얻게된다.
올해가 천마총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이고 이에 맞추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특별전을 열었다.
천마도는 말의 옆구리에 붙이는 장식물(말다래)인데 좌우측 2개가 쌍으로 나왔고 보통은 그중 산화가 덜한 아래쪽에서 발굴된 것이 주로 전시됐는데 이번 전시회에서는 모처럼 위쪽 것도 순환 전시되고 있다.삼국시대의 그림으로는 고분벽화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
천마총의 위치, 출처:국립경주박물관 리플렛
사진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황남대총이다. 아래표는 돌무지덧널무덤인 5개를 비교한 표이다. 이 형식의 무덤은 과거 적석목곽분이라고 불렸는데 막대한 양의 돌을 목곽분 위에 쌓았기 때문에 도굴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또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만의 특유한 매장방식으로 선상지 조건인 경주의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중요한 유물이다.아직 발굴되지 않고 많이 남은 신라고분은 후세들의 몫으로 남겨져 발달된 발굴기술로 찬란했던 문화를 밝혀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 비교, 출처:국립경주박물관 리플렛
이번 특별전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집중전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 이후에 유행하는 방식으로 대표유물만을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방식이다. 이는 박물관을 단순히 정보제공의 장소를 넘어 힐링의 장소로 탈바꿈시키는 좋은 시도이다.
천마총 금관, 국보 제188호 ⓒ 전영식
천마총 금광 머리부분, 곡옥이 달린 모습 ⓒ 전영식
천마총 관모(국보 제189호)와 금제 관식(보물 제618호) ⓒ 전영식
천마총 금제 관식(보물 제 617호) ⓒ 전영식
천마그림 말타래 II,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리플렛
155호분은 발굴 이후 천마총으로 이름 지어졌는데 경주 김씨 종친들은 왕릉에 말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며 '천마도 왕릉'이라고 이름 붙여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왕릉임을 특징할 유물이 없어 천마총으로 붙여졌다. 금관은 이미 여러 곳에서 나왔으니 붙일 수도 없었고 나중에 말다래를 x선으로 분석한 결과 뿔이 보여서 '기린총'이 맞는 이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천마총에서는 다량의 금제품과 함께 철제품도 출토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많은 양인데, 이것들이 어디서 생산되고 만들어졌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보통 가야를 철제문화의 선도지역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재 유물은 신라에서 더 많이 출토된다. 이는 지질학적으로도 밝혀내야 할 흥미로운 과제이다.
전국의 국립박물관은 자신의 대표유물을 중심으로 특별전을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수준 높은 전시 및 해설도 있으니 이것만을 목적으로도 여행지를 선정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