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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Jan 18. 2023

추웠던 문경새재의 추억과 미국 화산

3번 국도 지질연대기

문경새재(최고점 632m)는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다. 조령(鳥嶺)이 라고도 하는데 고개가 높아 나는 새도 넘기 힘들다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문경 하늘재와 괴산 이화령 사이에 난 고개라서 새재라고 붙였다고도 한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거리길인 영남대로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제1군 고시니 유키나가와 제2군 가토 기요마사가 이 길로 한양으로 직진했다. 그것도 아무런 방해 없이 빠르고 편안하게 갔다.


후삼국시대에는 견훤과 왕건이 929년 맞붙은 가은성 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영남 선비들이 이 길로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갔는데, 북쪽 죽령으로 가면 대나무 잎같이 미끄러져 떨어지고 남쪽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풍문이 있어서 조령이 인기가 높았다. 임진왜란 뒤 3개의 관문(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요새로 삼았다.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잘 꾸며져 근사한 트레킹 코스가 나 있다.


이상하게 추웠던 해


개인적으로 학생 시절이던 1980년 여름방학에 문경새재로 캠핑을 갔던 기억이 남아있다. 확실한 기억은 안 나지만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트레킹을 했던 것으로 보아 괴산 쪽에서 넘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유난히 기억에 는 장면이 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서늘해서 그 개구쟁이 중 누구도 개울가에 들어가는 친구가 없었다는 것과 땀도 안 날 정도로 오히려 추웠다는 점이다.


문경의 1980년도의 일자별 최고 기온 중 일부, 출처: 기상청 과거자료


기상청 과거 기온 자료를 살펴보니 한여름인 7~8월에도 매우 서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최고기온이 20.5도인 날이 있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1980년은 폭염일수가 하루도 없었고, 광복 이후 가장 서늘한 여름 중 한해였다고 한다.

냉해피해 보도기사 동아일보 1980년 8월 14일 자



결국 1980년 내내 격심한 이상 저온 현상 끝에 기록적인 흉년을 겪게 된다. 1979년 556만 톤에 달하던 미곡생산량은 그해에서 355만 톤을 수확하는데 그쳤다. 주곡 자립을 달성했던 1977년 600만 톤에 비하면 수확량은 거의 반으로 떨어졌다. 당시 미국의 100년 만의 열파, 호주의 가뭄, 소련의 한발, 북구의 냉해와 홍수 등으로 세계 곡물 수급이 불안한 상황에서 5월 18일 미국의 세인트 헬렌스(St. Helens) 화산의 폭발은 냉해 종합세트를 완성했다.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폭발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위치, 출처: 구글지도


세인트 헬렌스 화산은 역사 상 북미에서 발생한 가장 큰 화산이다. 분화 전부터 분화과정, 결과를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한 최초의 화산폭발이다. 예상치 못한 측면 분화로 화산의 북쪽 사면이 완전히 날아갔다. 이 폭발로 2,900m 이상이었던 정상부의 400m 정도가 낮아졌다. 600평방 km의 산림지대가 황폐화됐고 암설류(debris flow)가 29km 떨어진 터틀(Turtle) 강까지 흘러내렸다. 화산재는 19km 상공의 성층권까지 올라갔는데 총 1 입방 km의 화산재와 암설을 대기 중으로 방출했다. 인근 주들에 분출물이 쏟아져 내려 두껍게 쌓였으며 얼마간 전 세계 기온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폭발, source: Wikimedia commons by U.S. Forest Service


캐스케이드 산맥에 위치한 세인트 헬렌스 산은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 화산대에 위치한다. 이 산맥은 태평양 판이북미판의 아래로 섭입 되면서 만들어진 산맥이다. 따라서 세인트 헬렌스 산 주변에는 화산들이 잔뜩 있다. SiO2 성분이 많은 안산암질 마그마가 분출되면서 폭발적인 분출을 하였다. 이런 폭발적인 형태의 분화를 스트롬볼리식(Strombolian) 분화라고 한다.


통일벼에 튄 불똥


1980년의 이상 저온은 뜻하지 않은 곳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우리가 주곡 자립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통일벼’라는 품종의 다수확 벼 때문이었다. 1966년 식량 자급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Japonica)와 다수확품종인 일명 ‘안남미’가 열리는 인디카(Indica)를 교배하여 만들었다. 다른 품종보다 30% 정도 생산성이 높았다. 1972년부터 전국으로 보급하였고 결국 1977년 주곡 자립을 달성했다. 쌀 먹지 않는 날인 ‘무미일(無米日)’이 없어졌고 선생님이 학생 도시락의 쌀밥을 검사하지 않게 됐다. 또한 쌀막걸리의 제조가 허용되었다.


통일벼 재배(1975), 출처: 역사박물관 근현대사 아카이브, 경향신문사 소장자료


통일벼는 정부의 수매우대정책, 이중곡가제 등 강력한 의지로 재배면적이 1978년 전체의 76.2%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통일벼는 열대종인 인디카가 교잡되었기 때문에 냉해에 취약했고 비료와 농약이 많이 필요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단점이 밥맛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면적에 재배되던 통일벼는 1980년 냉해에 직격탄을 맞게 되었고 이후 점점 퇴출의 단계로 들어간다. 1991년을 끝으로 통일벼의 수매를 종료하였다. 정부미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질보다 양을 선택하여 만든 통일벼는 대부분의 논에 심어져 생태학적 다양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도열병이 다시 발생하고 이상 저온이 발생하면서 여기에 대응할 힘이 약해진 생태계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도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사건은 우리 주변만이 아닌 바다 건너의 지질학적 사건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1.     김석기, 2017, 토종 씨앗의 역습, 들녘

2.     박인수 외, 2009, 환경지질학, 시그마프레스

3.     샘킨, 2021, 카이사르의 마지막 숨, 해나무

4.     함세영 외, 2016, 지질환경과학, 시그마프레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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