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한 예술인이 선물해 준 실팔찌를 맨 체 미얀마로 이동하였다. 태국은 사실 새로울 게 많이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방문을 했었으므로. 그러므로, 근접국가인 미얀마를 가 보기로 하였다. 태국 방콕에서 비행 편을 이용하였다.
양곤, 바간을 거쳐, 만달레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도 외국 배낭 여행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하루는,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변 여행객들을 관찰하면서 말이다. 옥상에서 맥주 등 음료를 판매하였다. 젊은 여행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허나, 홀로 앉아 있으면서, 더 이상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곧 떠나야 함을 직감으로 느꼈다. 야간버스를 타고 양곤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새벽에 도착한 곳은, 양곤에 위치한 한 국제 명상 센터.
그 당시에는, 이 명상센터의 경험이 특별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나의 첫 명상 리트릿 경험은 시작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시작은 점차 미묘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양곤으로 향하기 전, 만달레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우베인 다리 (U Bein Bridge)에 방문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 근처에 한 불교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명칭은 마하간다용 수도원 (Mahagandhayon Monastery). 미얀마 최대 규모의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한 승려로부터 명상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소개받았다. 가는 방법을 메모지에 적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 수도원은 대규모 탁발 행렬로 유명한 곳이다. 약 1천여 명의 승려들이 수행을 한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보곤 다음 행선지를 모색하였다. 그곳 주변 사가잉 (Sagaing)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가잉은 미얀마 불교의 중심지였다. 많은 불교 수도원이 있다고 한다. 내가 왜 이 사가잉이라는 곳을 가게 되었을까? 만달레이 시내에서 우베인 다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한 시간은 꼬박 걸린 것 같았다. 도로도 잘 정비되지 않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우베인 다리에서 사가잉이라는 곳까지는 자전거로 또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종종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말이 필요 없기도 하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한 것 같다. 큰 다리를 하나 지나니 사가잉이라는 곳에 도착을 하였다. 여러 곳을 방문했다. 많은 사원들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한 불교대학 같은 곳이었다. 다양한 얼굴의 붓다상이 있던 그러한 곳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로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매우 한적한 곳에 위치한 한 명상센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 입구를 지나니, 평범해 보이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자연스레 명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본인의 명상체험을 공유해 주었다. 본인은 술 주정뱅이였는데, 명상을 배우고 인생이 변했다고 한다. 그리곤 명상체험에 대한 특정한 묘사를 하였다.
그는 돋보기로 태양빛을 모으는 묘사를 하였다. 태양빛을 한 곳으로 모으면 매우 강렬한 에너지가 발생된다고 하였다. 이 설명을 본인의 손바닥을 가리키며 하였다. 이 말인즉, 지금 생각해 보면, 명상의 집중력을 이야기한 것 같다. 한 곳으로 모아진 빛은 강렬한 에너지 발생하며 대상을 태운다. 물론, 물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마음을 모아서 한 곳으로 집중하면, 집중 대상이 된 마음의 상태 혹은 번뇌가 태워짐을 (혹은 사라짐) 비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매우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통찰력 깊은 비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이 아님을 느꼈다. 미얀마에 오기 전에는, 미얀마는 그저 저개발 빈곤 국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러한 이미지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국가의 경제적 위치와는 대조적으로, 이곳 사람들은 매우 행복해 보이고 친절하다. 또한, 가난한 국가이므로, 사람들이 무지할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오히려, 미얀마를 여행을 하고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배울 점이 많고 자비심으로 넘치는 사람들이다.
이 중년의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난 후, 명상이 정말 배울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는 내가 명상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나를 그곳에 거주하는 스님들에게로 데려다주었다. 두 명의 스님이 나왔다. 그 남자가 스님들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곳보다는 양곤에 있는 한 국제 명상센터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제안을 해주었다. 그곳에서는 외국인들도 많고, 영어로 안내도 하고 설명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정보를 입수하고 만달레이 시내로 되돌아갔다. 그곳 사가잉에서 만달레이 시내까지는 약 30km의 거리다. 차를 타고 가도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감한 도전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그곳의 거리가 30km나 되는 곳이란 것을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곳에 갈 염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명상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야간 버스를 타고 양곤에 도착하니 새벽 4시 5시 정도였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 버스 터미널에서 소개받은 명상센터까지는 먼 곳에 있지 않았던 터라,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예약도 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갔지만, 운이 좋게도 입소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었던 것처럼 척척 맞아떨어졌다. 바로 아침에 여직원의 안내를 받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한 후 바로 입소를 하였다. 내가 머문 곳은 외국인 요기들로 구성된 숙소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7-9명 정도의 한국 남자분들이 계셨다. 그분들 사이에서는, 현직에 계시는 요가 및 명상 강사, 한국 테라바다 불교 고문, 한 지방 대학의 교수, 목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 스님도 두 분 계셨다. 머리가 민머리였고 복장이 스님 복장이었으므로 스님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이 한국 사람들과 크지는 않지만 작은 그룹이 형성되었다. 한국 여성분들도 4분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상은 비교적 자율적인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특별히 감시를 하거나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은 없었다. 그리고 특정한 날이 되면, 한 젊은 미얀마 스님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한국어를 미얀마어로 통역해 주시는 분이 있었다. 한 명상 지도 스님과의 상담 시간에, 이 미얀마 통역사 분이 한국 수행자들과 지도 스님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가교역할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매우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10일간의 명상 체험 후, 약 1년간 분투한 나의 유학 계획이 송두리 째 무너저버렸다.
미국 유학을 포기한 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산으로 향했다. 편리함 보다는 자연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서서히, 고기의 섭취를 줄이고 채식 식단으로 바꾸어 갔다. 내가 주로 시청하던 영상 프로그램도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꾸준히 명상을 해 나아갔다. 좀 더 내면의 시간에 투자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청산이 되었다.
단순한 삶을 살고자 떠난 산 중턱의 생활이었다. 그러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느 정도 속세의 생활은 유지를 하였다. 대학원생이 되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생활을 떠나 단순하고 조용한 산 중턱의 생활이 오히려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석사과정 중 연구실적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실적을 기반으로, 꽤 좋은 장학금 조건으로 미국의 한 저명한 공립대에 유학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미국 유학을 포기했을 때, 사실 미국 대학원 한 곳에서 입학 허가서가 왔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입학하지 않고 한국 대학원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내가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간 곳은 바로 입학 허가서를 나에게 보내주었던 그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갈 운명이었던 것일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운명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