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을 이어온 억새

늦가을 동구릉 산책이야기.

by 구현

왕숙천을 걷다 구리로 넘어가는 다리를 지날 때였다.

문득 아내가 말했다.

"동구릉에 가볼까? 단풍이 예쁠 것 같은데."


천천히 걸어 동구릉까지 갔다.

소나무가 주인인 숲이지만,

드문드문 단풍이 곱게 물든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피톤치드가 느껴지는 맑은 공기 속을 걸었다.


동구릉에 오면 언제나 향하는 곳이 있다.

건원릉.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잠든 곳.


능 위로 가득 자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고향 함흥에 억새가 많아,

자신의 무덤에도 억새를 심어달라 했다고 한다.

능 근처에는 억새를 따로 키우는 장소도 있었다.


그 말이 명령이었는지, 부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후손들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지키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며 생각했다.


한 사람의 마지막 바람이 600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유언을 지키는 사람이 있고,

그 덕에 우리 같은 이들이 이 길을 걷는다.


조상이 남긴 것으로 우리가 산다.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유언이 누군가의 일이 되고,

그것이 또 누군가의 쉼터가 되는 것.


우리는 천천히 동구릉을 걸어 나왔다.


아내가 매표소를 지나며 말했다.

"저 일 참 좋겠다. 여기서 일하면 매일 이 공기 마시면서 일할 텐데."


"남의 직업은 원래 쉬워 보이는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소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단풍은 가을을 머금었다.


능 쪽에서 보았던 억새가 계속 떠올랐다.

억새는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다.


600년 전 한 사람의 그리움이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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