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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쓰는 곰 Oct 14. 2024

왜 그러지?

<베를린 곰 편지>

베를린에서 공부하려면 우선 체류허가를 받아야 하고

허가 심사를 받으려면

인터넷으로 심사날짜를 예약해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예약 가능한 시간이 나오지 않았다.

예약을 못하면 방법은 하나,

외국인청 문 앞에서 밤 새 기다렸다 예약번호를 받아야 한다.

코로나 이후 전면 인터넷 예약으로 바뀌었지만

2016년, 그땐 그랬다.   


D-day 밤 열두 시.

용용이와 외국인청에 왔더니 이미 15명이 줄 서 있었다.

새벽엔 영하 8도까지 내려간다고 하여

옷을 겹겹이 입고 따뜻한 물, 간단한 간식거리,

방석 매트 2개와 무릎담요를 가져갔다.

하지만 무릎담요와 얇은 방석매트 따위로

칼바람과 바닥에서는 올라오는 냉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냉기를 못 견디겠으면 섰다가, 다리 아프면 앉았다가 했다.

그래도 다행히 눈비는 오지 않았다.  


오들오들 떨며 ‘시간아 얼른 가라’하는데

앞에 선 청년이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아무 준비도 못해와 힘들다고,

간단히 요기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다고.     

한 시간쯤 지났나?

청년은 종이박스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혼자라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자리를 맡아주어 고맙다며

박스 두 개를 주었다.


종이 박스가 그렇게 요긴한 줄이야!

두장을 바닥에 겹쳐 깔고 매트에 앉았더니

더 이상 오돌오돌 떨리지 않았다.     


청년은 머리가 따뜻해야 몸이 따뜻하다며

쓰고 있던 노란 비니를 벗어 용용이에게 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왔다는데,

그럼 우리보다 추위를 훨씬 많이 탈 텐데.

우리가 괜찮다고 했는데,

청년은 한사코 용용이에게 모자를 권했다.  

용은이는 고맙다며 모자를 썼다.

평소라면 낯선 사람 머리냄새가 밴 모자를 쓸 리가 없는데.     


아침이 되자 외국인청 문이 열리고

경비원이 차례로 번호표를 나누어 줬다.

청년도 우리도 무사히 번호표를 받았다.

우리 뒤로 이백 여명 정도 있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표를 받지 못해 항의를 했지만

경비원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표를 받은 사람만 차례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주위를 서성이다 돌아갔다.

마음이 불편했다.      


심사관은 영어로 물으면 대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엉터리 독어로 말하거나 알아듣지 못해 멍하게 있었다.

그런데 심사관은 서류가 완벽하다며 체류를 허락했다.

믿기지 않았다.

정말 끝인가요?

체류허가서를 주나요?

정말인가요?

어설픈 독어로 몇 번을 물었더니

웃음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처럼

근엄한 표정의 심사관이

웃었다.


이렇게 쉽게 주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체류허가증 발급을 위한 수수료를 내고 나니

실감이 났다.

용용이랑 나는 한껏 가슴이 부풀었다.

2년 동안 독일에 머물러도 된다는 허가서를 받았을 뿐인데

마치 음악학교 입학허가서를 받은 것 마냥 좋아했다.     


좋아라고 외국인청에서 나오다

아까 그 청년을 만났다.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결과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청년은 여기서 돈을 벌어 고향에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쫓아낼까?       


국적국가 안에서 이사할 때는 보통 ‘신고’만 하면 되는데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난 잠깐 오들오들 떨고는 체류허가서를 받았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큰 용기를 내고 어렵게 돈을 마련해 온 사람들은

체류허가서를 받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존 래논은 노래했다. -imagine-  

나라가 없는 걸 상상해 보라고.

죽이거나 죽지 않는다고.

그건 어려운 일 아니라고,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고.

중학교 1학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나라가 없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만 해보라는데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걸 왜 상상해보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저절로 상상하게 된다.


상상 속의 나라는 강 같다.

거기 늘 있지만

어제의 슈프레강 물

오늘의 슈프레강 물 같지 않다.

어제 그 강물은 전엔 어딘가의 지하수였을 것이고

얼마 후엔 슈프레 강물이었던 바닷물이 되거나

슈프레 강물이었던 구름이 될 것이다.      

사람도 강물 같을 수 없나?

아시아 대륙의 동쪽끝 한반도에 들어와 살면 한반도 사람,

거길 떠나 중앙아시아 몽골초원으로 가면 한때 한국 사람이었던 몽골초원사람.

오지 말라고 막지도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않고

그저 그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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