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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쓰는 곰 Mar 17. 2024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

<베를린 곰 편지>

처음 얼마간은 체류허가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아노를 배우러 왔지만 피아노 선생님은커녕 연습실도 알아보지 못했다. 용용이는 한 달가량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 만나주겠다고 했던 교수로부터 메일이 왔다. 내일 오후 두 시 한스 아이슬러 음대로 오라고.


약속 당일 오전.

연습실을 못 구해 쩔쩔매다 기념품가게 안 그랜드 피아노를 발견했다. 쇼윈도에 바짝 붙어 섰다. 층층이 레이스의 알록달록 집시치마를 입은 주인할머니가 피아노 옆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가 웃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할머니는 오래는 곤란하고 한 시간 정도 연습하라고 했다. 장사하는 곳이라 불편할 텐데... 참 고마웠다. 덕분에 용용이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피아노 연습을 했다.  


한 시간 연습을 하고 한스 아이슬러에 갔다. 답변을 보내주신 분은 피아노과 학장이셨다. 용용이 연주를 듣더니 당신은 가르쳐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희망이 사그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희망을 가진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지만.


용용이가 취미로 피아노를 친 건 1년 남짓,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건 반년 전이다. 그중 한 달은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했고. 그런데 가게에 장식으로 둔, 조율도 안 된 피아노를 한 시간 치고는 세계 피아노 영재들이 오는 학교의 학장을 만나러 간 거다. 그땐 그런 것도 생각 못할 만큼 뭘 몰랐다.     


우리는 낙담한 채 방을 나왔다. 그런데 그냥 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가면 피아노 선생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학장님 바지  자락이라도 붙잡고 매달려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교수실을 노크했다.

“당신이 아니라도 좋아요, 선생님을 소개해 주세요.”

그분은 마지못해 제자를 소개해주었다. 젊은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V선생님.


그분은 열정적이었다. 작은 소리를 내야 하면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았다 커지는 곳에서는 용수철처럼 펄쩍 뛰고 발을 쾅쾅 구르고. 레슨을 한 시간 반하고 나면 선생님은 녹초가 되었다. 레슨경험이 별로 없는 선생님은 가르쳐주고 싶은 걸 잘 전달하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용용이는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쳐주어 감사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좋은 소리를 낼지 몰라 막막해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봤다. 감동을 받은 용용이는 연주자에게 좋은 연주를 들려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연주자가 말했다. 자신도 어릴 때 베를린에 와 고생을 했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분은 기꺼이 베를린 음대 S교수 연락처를 주었다. 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해도 용용이에게 마음을 내어준 피아니스트가 정말 고맙다.


S교수는 용 한 시간 정도 레슨을 한 뒤 앞으로도 계속 가르쳐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우물쭈물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딱 한 번만 더 레슨을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자 열흘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열흘 뒤, S 교수는 용용이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변했다며 놀라워하고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그날은 음악학교 입시 3일 전이었다. 암만 늘었어도 실력은 입시를 통과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걸 시험장에 가서야 알았다. 시험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참 아름다웠다. 아주 어린 학생의 연주도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심사위원장이 용용이에게 말했다.

“넌 우리 학교에 맞지 않아. 다른 길을 찾아봐라.”

심사과정을 참관한 V선생님이 말했다. S교수만 용용이를 지지하고 모든 교수들이 반대를 했다고. 특히 심사위원장이 강하게 반대를 했는데 이럴 경우 다시 지원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 했다.


용용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이제 포기하겠구나 했는데 울면서 자기도 멋지게 연주하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내 생각은 달랐다. 몰랐을 땐 막연히 하면 되겠지 했는데 직접 보니 희망이 싹 가셨다.

그렇지만 너무 간절히 원하는 용용이를 보니 어쩔 수 없었다. S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S교수는 대학에 재직 중이라 용용이를 가르칠 수 없다, 대신 정말 좋은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이반초바 선생님.

은퇴한 한스아이슬러 음대 교수인데 60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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