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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쓰는 곰 Mar 10. 2024

무모할 수 있게 한 모든 것에 감사를

<베를린 곰 편지>

“나 피아니스트 될래.”

어릴 때부터 용용이가 말했다. 음악에 문외한인 내겐 "나 슈퍼맨 될래”처럼  현실성 없게 들렸다. 피아니스트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재능을 알아본 부모와 선생님의 지지아래, 어릴 때부터 엄청난 연습을 해도 될까 말까 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13살 여름쯤부터 용용이가 휴일이면 아홉 시간씩 피아노를 쳤다. 취미로 배운 지 1년 남짓이라  칠 수 있는 곡도 많지 않은데. 현실성 없단 생각에는 변함없었지만 더 이상 용용이 꿈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 지인이 이 선생님을 소개해주었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어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가 반대했고 중학교 때는 피아노 덮개를 덮어 열쇠로 잠가버렸다. 덕분에 뒤늦게 제대로 시작하여 용용이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했다. 마음을 이해하고 사려 깊게 가르쳐주셔서 감사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용용이한테 피아니스트가 될 만큼의 재능이 있을까요?”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아쉽게도 그건 끝까지 가 봐야 알 수 있어요. 천재만이  끝까지 열정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거든요. 그래도 분명한 건 재능이 없다면 용용이처럼 열정을 가지고 몰입할 수 없다는 거죠.”     


그야말로 우문에 현답. 덕분에 생각이 정리됐다. 나중에 어찌 될까 하는 걱정이 무슨 소용일까? 배우고 익힐 의지와 기운이 있으면 배워야지.     


주변에 도움을 청해 C 씨를 소개받았다. 딸이 독일음대에서 첼로를 배우고 있는. C 씨가 말했다. 딸은 독일에서 행복하게 배우고 있다고. 음악학교 학생들은 국적, 욕구, 경험, 배경이 아주 다양하고. 그래서 일렬로 줄 서는 경쟁이 아니라 자기 욕구와 개성에 집중한다고. 게다가 국립음악학교에선 레슨비가 들지 않는다고.     

따뜻하게 말해준 C 씨의 경험담은 불씨가 되었다. 

베를린에 온다고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이 ‘짠’ 열릴 리 없건만 왔다.     


각오하고 왔지만 생각보다 막막했다. 독어를 거의 못하고 영어도 어눌한데 3개월 안에 체류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입신고하고, 은행계좌 만들고,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서두르면 하루 이틀에 끝낼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어도 2주는 걸린다.

거기에 하나 더. 용용이가 음악학교 입학 전에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20 곳 넘게 문의 메일을 보냈지만 받아주겠다는 김나지움이 없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피아노 선생님이 없었다.

선생님도 없이, 독어도 못하는 상태로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됐다.     


뮤직김나지움에 선생님과 입학에 대한 문의메일을 보냈지만 홈페이지에 나온 입시요강 이상의 답이 없었다. 주한 독일 대사관에 문의하니 용용이는 체류허가를 받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주변에서는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아니면서 13 세 살에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엔 좀 늦었다고 했다.

용용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고 정보를 구할 수도 없었다. 뮤직김나지움 입시요강에 따르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언어자격요건과 입시 난이도가 가파르게 높아진다.     


마음이 급했다. 베를린음대와 한스아이슬러 홈페이지에서 피아노과 교수들 메일 주소를 찾아 배우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다. 한스 아이슬러 교수 한 분이 만나주겠다고 했다.     

'독어를 배워도 독일에서 배우는 게 더 빠르겠지, 일단 가자. 가서 알아보자.' 

이러고 베를린에 왔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러길 잘했다.

뭘 몰라서 다행이었다.     


여기서 겪게 될 일들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따뜻한 조언이 지핀 불씨쯤은

간단히 꺼져버렸을 것이고 이반초바 선생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모할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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