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3개월이 지나 다시 음악학교 입시 때가 됐다.
낙방의 경험 덕에 어느 정도 감이 생긴 용용은 이번 말고 다음 학기에 시험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경험이 중요하다며 되던 안 되던 시험을 보라고 밀어붙이셨다.
그리고 또 낙방.
그런데 이번엔 심사위원장 말이 달라졌다.
“많이 좋아졌네. 하지만 우리 학교에 들어오기엔 부족해.”
지원자들이 많은데 용용을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실력이 너무 못미치는데 지원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반초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좋아! 이번엔 쇼팽 발라드 1번, 베토벤 템페스트 전 악장을 하자. 바흐 평균율이랑 쇼팽 에튀드도.”
제대로 배운 지 불과 일 년 남짓, 시험까지는 6개월도 안 남아서 무리일텐데 용용이는 해보고 싶어 했다.
좌절하고, 조바심내고, 두려워하고, 열망하고….
이런 단어로 뭉뚱그리기엔 미안할 정도로 치열한 시간이 지나고 세 번째 도전을 했다.
연주가 끝나고 결과를 듣기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 앉았다.
우리 학교는 너에게 맞지 않으니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던 심사위원장이 중앙에 있었다. V 선생님이 심사위원장 반대가 워낙 강경해서 다시 봐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래도 연주가 달라지면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
힘들 거라는 것을 알지만 기대를 놓을 수는 없었다.
심사위원장이 말했다.
“네 음악에 감동했어. 내가 널 가르쳐도 될까?”
어리둥절했다. 합격했다 정도가 아니라 용용이 음악에 감동했다니.
심사위원장은 용용이 연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연주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했다.
용용은 바흐뮤직김나지움에 다니며 심사위원장 E 교수님께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반초바 선생님은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놓는 부모처럼 슬프고 기쁘다고 하셨다. 용용은 이반초바 선생님께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바흐김나지움에 입학하면 한스아이슬러나 베를린음대 교수에게 레슨비 없이 배우는데 선생님은 이미 은퇴를 하셨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번 내 학생은 영원히 내 학생이야.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배워. 이제 레슨비 필요 없어."
이전에도 선생님은 가끔 레슨비를 받지 않으셨다. 멀리 와서 공부하니 경제적으로 힘들 거라면서. 그리고 아주 힘들 땐 말하라고, 그럼 레슨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에겐 제자가 많다. 어린 학생부터 나이가 든 사람까지. 배경도 다양하다.
독일 통일 전 선생님은 동베를린에 계셨고 그땐 북한학생들도 가르치셨는데. 설이면 북한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만둣국에 김치도 드셨단다.
어느 날은 표정이 안 좋으셔서 무슨 일 있으시냐고 여쭸다.
“좀 전에 어떤 학생이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어. 한국 재벌 기업 자녀라는데 좀 이상해. 첫만남인데 여기저기 찢어진 바지에 집에서 입는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왔어.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경호원 하나는 대문에, 하나는 현관에, 하나는 피아노 옆에 서는 거야. 연주를 들어보고 나서 가르치는 걸 거절했더니 그러대. 한 시간에 500유로를 줄 테니 가르쳐 달라고.”
500유로면 보통 레슨비의 다섯 배다. 선생님은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댁에 갔더니 S교수가 피아노 옆 소파에 앉아있었다.
이반초바 선생님은 그분이 가져온 꽃을 화병에 꽂아놓고는 예쁘다고 아이처럼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S교수가 용용이에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 레슨을 청강하고 싶은데 괜찮겠니?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듣다 갈게.”
낯선 풍경이었다. 하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이반초바 선생님과 용용도, 그 모습을 통해 또다시 배우는 S교수도 아름다웠다.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건 선생님 댁이 멀어서였다.
베를린이 아직 낯선 때였고 멀고 외진 곳이라 10개월간 용용이와 동행했다. 용용이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거실 탁자에서 독어 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탁자에 늘 히비스커스차와 과일, 내가 관심 있어할 것 같은 책이나 연주회 혹은 전시회 팸플릿을 탁자에 두셨다.
이반초바 선생님은 올해 팔순이시다.
여전히 하루 두세 시간 연습을 하고 가르치고 연주하신다.
전설의 피아니스트 아라우, 내로라하는 현역 피아니스트들, 그리고 용용이를 포함한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님의 팔십 인생에 담겨있다.
선생님이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