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짧은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 퀸 Apr 04. 2024

1971년 엄마의 노트


엄마가 떠나셨다.

난 엄마 유품을 정리했다.

옷장 윗 칸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엄마의 노트를 발견했다.


"엄만, 꿈이 뭐였어?"

"응? 어~ 날엔... 작가가 되는 거였지."

엄마 머리에 밀가루가 묻은 듯 새치가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엄마에게 딱 한번 물어봤던 게 기억났다.


팔 남매 중 장손인 아빠를 만나 대구로 시집간 엄마는 시든 배춧잎처럼 병든 시아버지 간호와 핫소스처럼 매운 시어머니를 모셨고,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진 시동생들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했다.


세월이 흘러 엄마의 허리와 다리가 굽어지고 지푸라기 같은 허연머리가 검은색을 다 지워갈 즈음 엄마는 드디어 자유의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탱탱한 피부와 잘록한 허리는 흔적도 없어진 후에야 찾아온 찰나 같은 자유. 안타깝게도 이 자유는 봄비에 눈 녹듯이 곧 녹아버렸다.


세월과 함께 누렇게 변해버린 노트 , 엄마의 필체가 반가워 난 눈물을 쏟았다.

'!엄마 글을 썼구나.'

난 노트를 펼치고 엄마가 1971년 10월 1일에 쓴 보았다. <2124년, 드디어 딸을 가졌다!>. 미래세계를 그린 소설인 것 같았다.

 

***


<2124년, 드디어 딸을 가졌다!>  

- 1971년 10월 1일 기록함


"여보, 저~ 셋째 가졌어요."

"아, 정말? 이번엔 딸 맞지?"

"네. 공주님이래요."

"아, 당신!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아내는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아내가 이리 기뻐하는 걸 보니 내 몸에 이식한 자궁에 시험관 아기를 안착시키느라 고생했던 일들이 커다란 눈물방울이 되어 서럽게 내 눈에서 밀려 나왔다. 첫째둘째가 모두 아들이라 이번에도 또 아들을 낳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이제 딸을 가졌으니 아내는 더 이상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 않겠지?


"당신, 정말 수고 많았어요. 우리도 드디어 딸을 가지게 되다니 이게 다 당신 덕분이야. 아 그건 그렇고 나 오늘 비즈니스 미팅 때문에 늦게 들어올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도록 해요."

"네? 그럼 오늘도 또 늦게 들어오시는 거예요?"

"일 때문이라 어쩔 수 없어.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집에 올 때 사 올게."


아내는 자주 늦게 들어온다. 일 핑계 대고 술자리를 늦게까지 갖고 때로는 최고급 술집에서 미끈하게 잘 빠진 남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지만 뭐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다.

고민고민하다가 목사님을 찾아갔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목사님은 나에게 다 용서하고 사랑으로 덮으라고 하셨지. 부모님과 똑같은 말씀이었다.

나도 한동안은 그렇게 해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아서, 화병이 생길 것 같아서, 결국엔 상담사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혹시 아내분이 도박하십니까?

"아니요."

"그럼 알코올 중독자입니까?"

"네? 아니에요."

"그럼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합니까?"

"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그냥 감사하면서 사세요. 요즘 여자들 일 때문에 다들 늦게 들어오고 일하다 보면 비즈니스상 술자리는 흔한 것인데. 그러다 보면 한두 번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 가지고 같이 사네, 못 사네 하시면 당신만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사세요."


친구들도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내 고민을 듣고 친구들은 나에게로 문제를 돌렸다.

"요즈음에 너 좀 살이 붙은 거 같아. 집에만 있다고 안 꾸미니까 네 아내가 딴 데로 눈을 돌리지. 너도 좀 가꾸고 살아라. 아직 딸 키우는 것도 아니면서. 벌써 그렇게 푹 퍼지면 안 되지. 딸 키우기 시작하면 눈코 뜰 새도 없어. 여아를 위한 영재교육 시작하면 돌보는 아빠도 숙제가 엄청 많아진다고."


그래, 그런가 보다. 모두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내가 좀 예민하게 굴었나 보다. 그래 감사하자! 그래도 이번에 드디어 딸을 낳게 되었으니 장모님도 좋아할 테고 우리 부모님딸 못 낳는 것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될 테니. 참 다행이지.


딸도 가졌으니 이제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겠다. 여아를 임신했을 경우 첫 달부터 클래식 음악과 명상반에 등록하고 다양한 언어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정부가 권장하고 있으니 내일 바로 프로그램 신청을 해야겠다. 아들 둘 그냥 신경 안 쓰고 키웠지만 이제 딸을 가졌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아들 둘은 결혼시키면 어차피 자기 아내들의 보호를 받을 테지만 우리 딸은 한 가정을 책임지고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되니 잘 키워야지. 물론 정부가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제공해 주겠지만 아빠로서 할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딸 가진 주변 아빠들을 통해서 봐왔지 않은가.


적성검사에서 과연 우리 딸은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나올까? 아내처럼 비즈니스를 잘할까? 장모님처럼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될까? 아니면 처형처럼 정치가가 되려나?

와우~! 생각해 보니 난 참 행복한 아빠로군.

그래, 아내를 위해 잘 내조하고 딸을 잘 키우는 게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고 이게 바로 행복 아니겠는가!


어? 갑자기 배가 땅기는 느낌이네. 우리 복덩어리 딸이 자궁 속에 있으니 내 몸이 준비작업에 들어가나 보다. 다음 주부터 잊지 말고 의사가 처방한대로 호르몬 주사량을 늘려가며 양수가 부족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다. 우리 이쁜 딸이 잘 자라도록.


그래, 힘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 태어날 우리 딸에게만 집중하자!


***

  

엄마가 이 노트를 꺼내서 읽는 걸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이 노트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몰래몰래 꺼내서 읽고 또 읽었을까? 


불공평한 세상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엄마는 자신 만든 이야기 공간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180도 뒤집어 놓았을까?


난 1971년 이 글을 쓰던 엄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엄마, 그거 알아? 이제 모두들 딸을 낳고 싶어 해."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마스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