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솜사탕 같은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저녁, 아빠는 사과박스를 품에 안고 집에 오셨다.
우리 4남매는 모두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킬킬거리며 만화책을 보다가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이게 뭐예요? 먹을 거예요? 사과?"
우리는 서로 질세라 쪼잘쪼잘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아빠는 웃으며 조용히 박스를 내려놓았고 그 순간 우리는 낑낑거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설마?!
아! 그 안에는 하얗고 조그만 강아지가 웅크린 채 몸을 보일락 말락 하게 떨고 있었다.
꺄아! 우리는 펄쩍펄쩍 뛰며 박스 주변을 빙빙 돌았다. 한바탕 엉덩이를 흔들고 두 팔을 들었다 내렸다 춤파티를 벌인 후 우리는 그 조그마한 생명체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 서로 어깨를 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우리의 보물을.
그날 세상을 덮은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 눈은 까만 바둑돌 같았고 코와 입 언저리는 마치 검은 크레파스로 스마일을 그려놓은 듯했다. 우리는 웃고 있는 이쁜이에게 '벙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렇게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진돗개와 치와와가 어떻게 합쳐졌지? 그럼 진돗개가 아빠고 치와와가 엄만가?"
"테레비에서 본 진돗개는 모두 누렇고 커다랗던데. 얘는 왜 흰색이지?"
"그럼 나중에 우리보다 덩치가 더 커지려나?"
"뭐, 할머니 머리도 하얗게 색깔이 변했으니까 얘도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누런 색으로 변하지 않을까?"
우리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중요한 건 벙글이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는 기쁨이었기에 어느새 궁금증은 저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저 올림픽에 나온 높이뛰기 선수처럼 점프하고 헬리콥터처럼 빙빙 꼬리를 돌리는 벙글이쇼에 우리도 덩달아 싱글벙글이 되었다.
벙글이는 무럭무럭 자라나면서 우리 막내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엄마가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넣어놓고 반찬을 만드는 사이, 벙글이는 앞 발로 턱 취사버튼을 눌렀다. 오후에 엄마가 맥심 커피봉투를 꺼내느라 부스럭거리면 벙글이는 총총 걸어가 커피포트 버튼을 꾹 눌렀다. 벙글이는 이렇게 엄마에게 최고의 비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가 벙글이를 산책시키려고 목줄을 찾으면 어느새 벙글이는 언니 운동화를 입으로 물어서 현관 앞에 대령해 놓았다. 내 차례가 되어 내가 목줄을 꺼내면 내 운동화를 앞으로 물어다 논다.
천재 벙글이!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우리에게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엄마가 갑자기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벙글이는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집에 혼자 있어야 했다.
"엄마, 벙글이가 혼자 있어서 스트레스받나 봐요. 벙글이가 이상해요."
"그러게, 얘 코가 왜 이렇지?"
"혹시 흙을 파먹나? 왜 코 주위가 주황색이지?"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거 보니까 많이 외로운가 봐요."
"벙글아, 아프지 마!"
"엄마, 벙글이 학교에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야, 그게 되겠냐?"
4남매는 떼거리로 걱정을 쏟아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걱정만 하던 한 달은 훌쩍 흘렀다. 노랗게 핀 개나리 앞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던 어제 오후부터 내 머리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날이 캄캄해질 때부터 자꾸 토하는 나를 엄마는 밤새 돌봐주셨다.
오늘은 더 이상 토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에 가지 말고 자라고 하셨다. 나는 약을 먹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이 꿈 저 꿈속을 헤매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긴 잠을 자고 나서 그런지 몸이 개운했다.
그때 이층에서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고는 가슴이 덜컹했다.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도둑이 든 건가?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집 안으로 들어왔나? 아직도 집 안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
도둑이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에 숨은 가빠지고 식은땀은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그때
대문 밖에 하얀 것이 보였다.
밖에서 총총거리며 빼꼼 열려있는 철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하얀 것. 그것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둥이로 아랫부분에 있는 걸쇠를 밀어서 원래대로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온 예쁜 언니들처럼 도도하게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계단 위 햇빛 좋은 곳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벙글이!
벙글이 콧잔등 위엔 녹슨 걸쇠에서 묻어난 귤빛이 살포시 얹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