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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Mar 21. 2024

벙글이의 비밀

작년, 솜사탕 같은 하얀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저녁, 아빠는 사과박스를 품에 안고 집에 오셨다.

우리 4남매는 모두 뜨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킬킬거리며 만화책을 보다가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이게 뭐예요? 먹을 거예요? 사과?"  

우리는 서로 질세라 쪼잘쪼잘 병아리처럼 삐약거렸다.

아빠는 웃으며 조용히 박스를 내려놓았고 그 순간 우리는 낑낑거리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설마?!


아! 그 안에는 하얗고 조그만 강아지가 웅크린 채 몸을 보일락 말락 하게 떨고 있었다.


꺄아! 우리는 펄쩍펄쩍 뛰며 박스 주변을 빙빙 돌았다. 한바탕 엉덩이를 흔들고 두 팔을 들었다 내렸다 춤파티를 벌인 후 우리는 그 조그마한 생명체 주변으로 동그랗게 모여 서로 어깨를 붙이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우리의 보물을.


그날 세상을 덮은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 눈은 까만 바둑돌 같았고 코와 입 언저리는 마치 검은 크레파스로 스마일을 그려놓은 듯했다. 우리는 웃고 있는 이쁜이에게 '벙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렇게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벙글이는 우리 집 안의 귀염둥이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벙글아~ 놀자~!"

한 번도 우리가 놀자는 말을 거절하지 않는 벙글이의 인기는 하늘로 높이 높이 날아가는 풍선같이 두둥실 치솟았다.

"벙글아~ 숨바꼭질하자!"

"벙글아~ 꼬리잡기 하자!"

"벙글아~ 패션쇼 하자!"

"벙글아~ 공놀이 하자!"

"벙글아~ 벙글아~ 벙글아~"


그중 우리가 제일 좋아한 놀이는 '벙글이 서커스단'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할 날이 왔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른 날.

 

"왔어요~ 왔어! 벙글이 서커스단이 왔어요!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머님도 오세요. 아버님도 오세요. 산 넘고 물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저 아프리카에서도 유명한 벙글이를 소개합니다. 벙글이 쑈쑈쑈~!!"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언니는 멋들어진 사회자가 되었다.

난 충실한 조련사. 벙글이와 쇼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항상 훌라후프쇼로 막을 열었다. 내가 후프를 들고 있으면 벙글이는 점프를 해서 그 사이를 넘어가는 쇼다. 때때로 벙글이는 그냥 걸어서 통과하기도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리의 박수와 환호성은 언제나 귀를 찢었다. 엄마가 입던 고무줄 치마를 목부터 걸친 남동생과 여동생은 최고의 바람잡이며 박수부대였다.   

"벙글이! 짝짝짝! 벙글이! 짝짝짝! 벙글이! 짝짝짝!" 심지어 입으로 박수를 쳐댔다.

 

"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습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쥐포~쑈!"


벙글이는 두 발로 서서 뱅뱅 돌 수 있었다. 벙글이가 쇼를 보여주면 쥐포를 상으로 주는 것이 룰이다. 물론 조련사는 나였다.


그런데 그날 내가 미쳤었나 보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난 그 룰을 어기고 말았다. 마땅히 포상해야 할 타이밍에 난 쥐포를 가지고 벙글이를 약 올렸다. 벙글이는 몇 번이나 점프해서 쥐포를 받아먹으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깔깔거리며 손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언니와 두 동생은 나의 어이없는 행동에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입을 딱 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벙글이 쥐포 줘. 장난하지 말고!" 언니는 내게 명령했다.

"왜? 재미있는데. 벙글이 좀 봐! 이거 먹으려고 점프하는 것 좀 봐. 하하하!"

하지 말라니까 괜히 더 하고 싶어서 난 언니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난 충분히 사악했다.

거기서 그쳤어야 했다.

그런데 내 안의 지옥 대마왕이 튀어나와 그 쥐포를 냅다 내 입 속으로 넣어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난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내 입에서는 어리석은 말이 튀어나왔다.


"쥐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이거 내 거야."


쥐포가 내 입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벙글이는 끙 소리를 내곤 나에게 등을 돌렸다. 방구석으로 가서 벽 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벙글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씹다만 쥐포를 꺼내 코 앞에 대주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한 벙글이는 나도 쥐포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쥐포를 코 앞에 들이대도 꿈쩍도 안 하는 벙글이를 보고 난 겁이 났다. 이러다 영영 벙글이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아닐지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더 이상 벙글이는 쥐포쇼를 하지 않았고  '벙글이 서커스단'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언니와 동생들은 이게 다 나 때문이라고 볼 때마다 날 비난했고 난 죽을 맛이었다. 밀려오는 후회와 죄를 씻기 위해 난 코도 들썩 않는 벙글이를 세 배는 더 자주 쓰다듬어주었고 거부하는 벙글이에게 쥐포도 들이밀어 보았다.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벙글이는 마음을 차차 열어서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들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쥐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몇 개월이 흘러 이 사건은 점점 잊혀 가는 듯했다. 어느 날 엄마가 쥐포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이상하네? 너희들이 그렇게 많이 먹는 것 같진 않은데 사다 놓으면 쥐포가 금방 없어지네."

이 기회를 놓칠 형제, 자매들이 아니었다.

"누가 쥐포를 제일 좋아하더라?"

"얼마나 좋아하면 벙글이것까지 뺏어먹겠어?"

지은 죄가 있었던 터라 이번 건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소리치지 못했다. 더 놀릴 게 뻔하니.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최선이었다. 쥐포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정말 어디 동굴에라도 들어가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어느 한 여름이었다. 더워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층 방에서 책상에 앉아 숙제를 꾸역꾸역 하던 나는 하품을 하며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 벙글이다!


마당으로 나온 벙글이가 입에 무언인가 물은 채 오른쪽 왼쪽을 차례대로 둘러보더니 조용히 정원 구석으로 총총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곤 흙을 파헤쳤다. 구덩이가 생기자 입에 물고 있던 무엇인가 그 안에 떨어뜨리고 다시 흙을 그 위에 덮는 폼이 삽질하는 훈련된 군인 같았다. 그리고는 네 발로 들뜬 흙을 꾹꾹 밟아주고 있었다. 마치 시체를 파묻고 완전범죄를 꿈꾸는 살인자처럼.


뭐지? 뭘 묻었지? 벙글이 장난감인가?


바로 내려가 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벙글이가 두려웠다. 뭔가 몰래 한 짓을 내가 들춰낸다면 벙글이의 자존심을 또 긁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궁금해 미치겠지만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그리고

드디어 때가 왔다.


토요일 점심을 먹고 식구들 모두 벙글이와 산책을 나갔다. 난 배가 아프고 화장실이 자꾸 가고 싶어서 못 나가겠다고 둘러댔고 집에 혼자 남을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은 마르고 손은 떨렸다.

벙글이가 꾹꾹 밟아 놓은 곳 언저리로 가서 정원에 있던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그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깊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무엇인가 있었다. 둥둥 북을 치는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박자도 안 맞추고 벌떡거렸다. 난 두 손으로 살살 흙을 걷어다.

드디어 속에 있던 비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쥐포!  


엄청 양의 쥐포가 묻혀 있었다.

벙글이는 시체를 한 구덩이에 넣고 또 시체 위에 시체를 포개놓은 연쇄살인범같이.

먹지도 않으면서 그 많은 양의 쥐포를 모아만 놓는 강박증 환자처럼.

그렇게 이상행동을 계속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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