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을 굴려야 하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또르르 눈물을 떨궈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상 속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보는 것도 한 번씩은 거쳐나가야 하는 성장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감수성이 폭발하는 십 대, 이제 갓 어린이의 티를 벗은 여중생들에게 친구란 부모보다 소중하고 어떤 애인보다도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친구의 차가운 눈길 한 번이 주변의 모든 사물을 꽁꽁 얼리고, 친구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모든 걸 다 녹이다 못해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던 당최 조절이라는 것이 되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사실 지나고 보면 성인들에겐 학창 시절 한 번의 중간고사 성적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먼지 같은 건데, 왜 그 당시에는 그 시험이 엄청난 인생의 무게로 느껴졌을까? 그 무게란 것이 나에게는 무거운 바위정도이었는데 내 친구에겐 생과 사를 가르는 지진 같은 것이었을까?
"선아야, 울지 마! 시험 좀 못 볼 수도 있지 뭘 그래~ 다음번에 잘 보면 되잖아."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에이, 나도 이번에 점수 잘 안 나왔어. 그래도 네가 나보다 더 잘 봤잖아." 난 선아의 어깨를 감싸고 달래 보려고, 그리고 나 스스로도 시험의 후유증을 털어내 보려고 애쓰며 엎드려 울고 있는 선아 귀에 속삭였다.
"내가 너하고 같아? 어디서 감히..." 갑자기 터져 나오는 선아의 우레 같은 소리. 선아는 내 손을 뿌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눈물로 얼룩진 눈엔 살기가 가득했다.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얼어버렸다.
선아는 다음 날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날 패전한 채로 집으로 간 선아는 자신의 몸에 해를 가했다. 놀란 부모는 선아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평소에 욕심도 많고 예민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의 미끄러짐이 그리도 참을 수 없었던 일이었을까? 한 번도 일등을 놓쳐 본 일이 없기에 왕좌를 빼앗긴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까? 아니면 사춘기의 극단적인 감정이 그녀를 송두리째 삼켜버려서 도마뱀 수준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된 걸까?
선아가 본인의 몸에 분풀이를 했을 때 난 내 마음에 분풀이를 했다.
'내가 너하고 같아? 어디서 감히...'
선아의 목소리는 고장 난 레코드 기계처럼 계속 반복돼서 내 머릿속을 휘저어놨다.
나는 감히 친구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비수가 되어 내 심장에 꽂히더니 파편이 되었다. 피가 엉킨 작은 칼날 조각들은 온몸을 돌아다니며 사방팔방으로 저주를 새겨놓았다. '네가 뭔데 감히 선아랑 비교를 해? 네가 그럴 자격이나 있다고 봐? 넌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같이 깔깔대고 웃던 선아와 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선아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유리라도 존재하는 듯 일정한 거리가 생겼다. 우린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걸까? 선아는 전보다 덜 웃었으며 쉬는 시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공부만 하고 있는 선아를 감히 방해할 수 없어서 곁눈으로 선아를 흘낏 보며 멍하니 자리를 뜨지 못하곤 했다.
선아의 얼굴에선 더 이상 광채가 나지 않았다. 함께 웃을 때 화산처럼 분출하던 에너지도 비밀을 공유할 때 심각해졌던 귀여운 이마 주름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선아는 그렇게 중학교 앨범의 한 구석만 차지한 채 목소리를 잃어갔다. 그 시절 나도 목소리를 잃어갔다. 난 더 이상 박장대소하며 웃지도 않았고 원숭이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조용히 투명인간처럼 있았고 내 입도 본드가 붙은 것처럼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했던 그 몇 달이 지나고 학년이 바뀌면서 선아와 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그때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최초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아니, 인간은 이론적으론 평등하지만 사람들 개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운 평이리라. 선아는 내가 감히 비교도 해 볼 수 없는 지주였고, 난 봉기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건 꿈도 못 꿔보고 그냥 내 운명을 받아들인 소작농이었던 게다.
흙수저, 금수저, 심지어 다이아몬드 수저가 한 밥상에 올라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처럼 느껴지는 대한민국 서울 하늘 아래 지금 선아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