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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Jul 23. 2024

AI 점

"오늘 2시에 예약하신 정수희 님 맞으시죠? 먼저 여기 이 질문지에 답변하신 후 제출하시면 됩니다."


3장짜리 질문지를 제출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기다리고 있는 수희를 한 노파가 힐끔거렸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노지귤을 연상시키는 이 할머니는 무엇이 궁금해서 왔을까? 근심으로 생채기 난 초췌해진 얼굴 위로 오렌지빛 희망이 울퉁불퉁하다. 절망과 희망이 한 얼굴에 곰보처럼 얽어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섬뜩하게 수희에게 다가왔다.


수희는 점 같은 것은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거지 무슨 운명이 있단 말인가. 운명이란 실패한 자들의 자기 합리화요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에 점집에 다니는 사람들을 나약한 인간이라고 비웃어주곤 했다. 어려서부터 남에겐 별로 관심이 없던 수희는 논리와 증명으로 일관되고 인풋과 아웃풋이 명백한 수학과 과학을 가장 친한 친구이자 거의 유일한 친구로 삼았다.


"정수희 님, 들어오세요."


방 한가운데 딱딱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 앉은 사내는 너무 말라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제복을 연상시키는 차이니스칼라의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양 귀를 덮고 있는 그의 긴 머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켜 수희를 안락한 곳에 앉힌 후 수희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안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 수희는 아무 말이나 해서 이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싶었다.

"저... 제가 논문을 쓰고 있는데요..."


잠시 침묵하던 남자는 입을 열어 어울리지 않는 바리톤 음성을 내뱉었다.

"<로봇에 감정을 심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란 제목으로 논문을 쓰고 있으시군요."

수희는 깜짝 놀랐다. 누가 내 정보를 미리 알려줬나? 어떻게 알았지?

"그렇긴 한데..."


수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남자의 귀로는 수희가 12년 전 겨울 이후 밖에 잘 나가지 않고 거의 혼자 외톨이처럼 살았다는 정보가 작은 기계음으로 들렸다.

"... 정수희 님... 힘드셨겠습니다... 12년 전 겨울... 크리스마스 이후로..."

순간, 수희의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두 입술은 서로 위아래를 못 맞추고 벌어졌다 다물었다를 반복했다.


"... 정수희 님... 여기 오신 진짜 원인을 마주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동그래진 그녀 눈 속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이 그녀 두 눈에 가득 고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이 사람 앞에서 수희는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천천히 끄덕였다.


사내는 갑자기 일어서서 수희를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친구분 말을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면 친구분이 들을 수 있으니, 저를 친구분이라 생각하시고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예주, 예주말을 들으실 수 있다고요?"

"네, 친구분이 정수희 님을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하시네요."

수희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온몸엔 한기가 들었다.

"예주? 예주야, 왜 그랬어. 대체 왜?"

"친구분이... 미안하다고 전해달랍니다."

"예주야, 네가 전화해서 같이 있어달라고 한 그 밤에 내가 너에게 갔었다면..."

"친구분 말씀이 정수희 님 잘못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날이 아니어도 결국엔 그렇게 됐을 거라고 하시네요."

"예주야, 그날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수희 님이 그런 마음일까 봐 걱정이었다고 합니다. 정수희 님이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 것 같아서... 정수희 님! 친구분은 지금 행복하시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자유롭다고 하시네요. 수희님이 유일한 친구였는데, 이 땅에서 살 동안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고 하네요. 안 그랬으면 잠시도 못 견뎠을 것 같았다고... 정수희 님이 우정이란 추억을 주었기에 지금도 행복했던 그 시간을 소중이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주야, 미안해! 미안해!"

"정수희 님, 이제 친구분을 떠나보내주셔야 합니다. 친구분이 정수희 님이 평안해지시길 바란다고 마지막 인사를 하십니다!"

"예주! 예주야!"

수희는 의자에 쓰러져서 수십 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예주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눈물을 통해 그녀 몸에서 다 빠져나갈 때까지.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그녀가 다 울 때까지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사내는 수희가 감정을 추스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가자 모든 정보를 다 알려준 AI Earaid를 귀에서 빼내어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창 밖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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