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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 퀸 Dec 25. 2023

크리스마스 선물

<제2화> 엇갈린 운명

- 그의 이야기


"여보, 이제 좀 괜찮으세요?"

몸이 너무 힘들어서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아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저 수면 아래에서 느리고 아득하다.

"다행이에요. 급체였다네요. 많이 놀랐죠?" 아내 목소리가 이제 제대로 들리니 상황파악이 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아까 낮에 거래처랑 가진 약속 두 건에 이미 위가 부대꼈었는데 저녁에 또 국밥 한 그릇을 급하게 다 비워냈으니 몸이 견뎌낼 수가 없었던게지.

"김기사한테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던지......" 숨을 가쁘게 쉰 아내는 이내 살짝 눈을 흘긴다.

"아니, 크리스마스 은인을 만나러 간다더니. 대체 뭘 그리 급하게 드신 거예요? 좀 천천히 드시지 않고~"


내 은인을 더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다 욱여넣은 나를 아내는 이해 못 할 거다. 아내를 만난 건 소위 성공이란 걸 하고 나서였으니까. 내 이전 모습도 아내에겐 상상이 안 되리라.


사실, 전부터 다 솔직히 말씀드릴까 몇 번이나 고민했던 일이다. 하지만, 은인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다. 물론 성공했다고 알려드리면 누구보다 더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겠지만, 그러면 그분에겐 더 이상 국밥을 사주실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이십 년 전 그날 크리스마스 사랑을 실천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뭔가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기쁨이 너무나 크다고 좋아하시던 그 표정을 해마다 드리고 싶다. 이것이 내가 그 사장님께 은혜를 같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다행히 사장님은 딱히 내 사정을 한 번도 물으신 적이 없다. 그저 해마다 한 번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나오셔서 뜨끈한 사랑을 주시고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


"여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고생을 안 해 본 아내의 고운 손이 내 거친 손 위에 포개진다.

"응? 아~ 이제 집으로 갈까?" 아내의 조그만 손을 투박한 나의 두 손으로 감싸고 고운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고운 피부가 밖에 내리는 흰 눈 같다.

"괜찮겠어요?" 볼이 연한 핑크빛으로 물든 아내는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럼, 이제 괜찮아. 그리고 집이 더 편하니 집에 가서 좀 더 쉬는 게 좋겠어."

나는 굳이 더 응급실에 누워있을 필요가 없어서 주섬주섬 모직외투와 목도리를 걸친다. 아내 손을 꼭 잡고 막 나가려는데 저쪽 구석에 있는 침대 위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난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간다. 맞다! 사장님이다! 그런데 왜 대체 여기에 사장님이.


수액과 영양주사 바늘을 꽂고 깊이 잠든 사장님 얼굴엔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주름이 여기저기 깊게 파여있고 눈두덩이는 푹 꺼져 있다. 바늘이 들어가 있는 팔뚝은 너무나 가늘고 몸은 왜소하다. 갑자기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모습에 아까 내가 만난 사장님이 이 분인가 혼란이 온다. 생긴 건 분명 사장님인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늙어버리지? 혹시 그분 큰 형님인가? 하지만, 다시 보니 나의 은인이 맞다. 옆에는 이마를 잔뜩 찡그리고 두 손을 꼭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여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사모님이겠지. 얼마나 급히 병원에 달려오셨기에... 집에서 입던 얇은 옷을 걸치고 있는 그녀는 추워 보인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아까 사장님과 저녁을 먹느라 함께 있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긴 하지만 이십 년 한결같이 밥을 사 주신 사장님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헤어지고 나서 길에서 차사고라도 났던가? 혹시 지병이 있어서 쓰러지셨나? 아님 차라리 그분의 형님을 보고 착각한 것이길.


엉거주춤 일어난 사모님은 젖어있는 눈시울을 손바닥으로 쓱 닦아내며 힘없이 웃는다.

"아~ 그러시군요. 남편이 늘 말씀하시던 분이시군요. 크리스마스이브에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꼭 도움을 줘야 하는 분이 있다며 며칠 전부터 한 끼씩 거르고 돈을 모으더군요. 약속한 밥 한 끼 꼭 사줘야 한다고. 그런데..." 사모님은 얼떨결에 나를 따라와 내 옆에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는 아내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뭔가 잘못된 걸 눈치챈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다.


아차! 내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사장님은 나의 행색을 이십 년 전 모습으로 이야기하셨을 테고 사모님은 당연히 내 모습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그런데 한 끼씩 걸렀다는 말은 또 뭐지?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긴 하지만 속인 건 사실이기에 사모님 앞에서 내 얼굴은 뜨거운 냄비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장님은 어쩌다가...?" 난 이해하고 싶다. 왜 사장님이 여기 환자처럼 누워있는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모님은 뭔가 실타래를 풀고 있는 사람처럼 느리게 내뱉는다. "사장님은 무슨... 이제 더 이상 사장이 아닌걸요. 칠 년 전 부도나고 쫄딱 망했는걸요. 상황은 해마다 점점 더 나빠지고 있고요. 그래도 크리스마스이브마다 꼭 나가야 한다고 했어요.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고. 일 년에 단 한 번인데 그 사람은 그 국밥이 없으면 삶을 포기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고..."


난 침이 바짝 마르고 뒷골이 땅긴다. 코끝이 시큰해지며 시야가 얼룩덜룩 흐려진다.


"요 며칠새 제대로 못 먹은 데다가 막노동으로 추위와 피로가 겹쳐서 쓰러진 것 같아요." 여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 영양실조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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