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계수나무와 함께 자라는
‘엄마가 잔소리를 시작하면
아이의 뇌가 멈춘다’고 한다.
많은 엄마가 알고 있고 많은 엄마가 아는데도 못 하는 것 중 하나가 그것이다.
비단 엄마뿐이겠는가? 관심이란 포장지에 싸여,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관성에 덮여 확대 양산되고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는 잔소리라는 메커니즘.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말. 우연히 영어를 너무나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방학이었고 어쩌다 내 손에 들어왔던 미국중학교 1학년 교과서 하나가 있었다. 한주에 몇 개씩 해보자며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아이들 어렸을 적에 공부하란 잔소리는 거의 안 했는데(기껏해야 숙제는 했니? 정도)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까닭이다. 신나게 잘 놀면 됐다 하고. 부모로서 챙겨야 할 것들 외엔 책 읽어주는 정도, 그것도 일에 쫓기고 쫓기며 간신히 조금 해 준 거 같다. 절대 독후감을 묻지 않는 예의 정도는 지켰고.
그런 내가 애가 묻지 않고 요청하지도 않은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나섰을 때 이미 내 안에 불안과 울화가 조금 있었나 보다. 아주 쉬운 단어조차 버벅대고 뜻은 물론 발음조차 잘하지 못하는 이 상태 뭐지? 중학교 3년 과정과 고1을 지냈건만 이건 서울 아이들 초등생 수준만도 못한 정도, 내가 너무 어미로서 직무유기였나 싶은 자책도 살짝 들었다. 드디어 정신 차려 아이를 다잡을 태세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마음의 각오를 하고 시작했다. 1 과를 펴서 읽기부터 시켰는데 역시나 더듬벅더듬벅, 안 보이는 눈으로 벽 짚고 땅을 조심스레 밟는 사람 같았다. 속에서 모락모락 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영어를 잘하겠는가?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배운 지 이십 년도 훌쩍 넘었는데 말이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영어는 일단 끊어 읽기만 잘해도 되는 거 아닌가. 괄호에 넣어 수식할 것을 모아 볼 줄 알면 더 좋고. 그런 식으로 읽기와 끊어 읽을 곳을 연필로 빗금 쳐 주며 여러 번 해 보았다. 소심하고 예민한 데다 자기표현을 맘껏 하는 아이가 아닌 작은 아들은 반복되는 읽기도 힘들어했고 해석은 물론 단어의 뜻을 모르니 잘할 리 만무였다. 기껏 두세 과까지 진도가 나갔던가? 참는다고 참아도 내 울화와 짜증이 어금니 사이에서 빠져나와 전달 안 될 리 없었다. 미세한 전파를 타고 공기를 가르는 그 불편한 마음은 아들과 나를 점점 더 가르고 더 톱질해 빙하가 녹아 떠가는 아이처럼 점점 멀어져 갔다. 세 번쯤 하다가 도무지 안 되겠다, 역시 자기 자식은 어려운가 보네. 돈을 받고 해야 친절이 나오나. 한참 전 대학에서고 학원에서 성인들 가르쳤을 때도 친절했건만 더는 친절 실종이었다.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아들, 해마가 줄어들었을 법한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책을 탁 접어버렸다. ‘안 되겠다, 엄마가 너를 계속 가르치다간 엄마는 엄마대로 성질부리고 너는 너대로 영어를 더 재미없어할 거 같다. 여기까지 하자.’ 아이 얼굴이 조금 피어난다. 한숨이 쉬어진다. ‘네가 영어를 지금 굳이 하지 않아도 너희가 사회에 나갈 때쯤이면 동시통역 기계가 잘 되어있을 테고, 필요하면 영어통역사를 두든지 아니면 영어가 필요 없는 일을 하면 되지, 뭐. 방법은 많이 있을 테니까, 그치?’하고 나니 아이 얼굴이 다시 환해지는 게 아닌가.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그깟 영어가 뭐라고 우리말만 잘해도 세상 사는 데 어려움 없었잖아. 아이가 유학을 갈 것도 아닌데...
내쉬는 한숨 사이 작은 내가 떠올랐다. 나도 어렸을 때 큰오빠가 수학을 가르쳐주며 윽박지르는 순간 뇌 정지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배움이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는 종류였다. 그런 내가 결혼하고 우리 아이들 어릴 때 동네 중학 2년생들한테 수학이며 과학, 생물 등 몇 가지 과외를 잠시 한 적 있었다. 수학이 참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걸 그때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아들한테 재미없던 3일 치 엄마 교사를 쉽게 떠나보냈다. 그 뒤로 뭐든 물어보지 않는 한 억지로 가르치지 않았다. 빨리 손 털길 얼마나 잘했던가. 나는 잔소리 안 하니 속 시원했고 녀석은 잔소리 안 들으니 편안했을 터.
전국에서 대안학교로 잘 알려져 있고 한때 경쟁률도 엄청 높았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를 남편을 비롯, 두 아들, 나까지 잠시 근무했던 그곳을 나온 뒤, 막내는 어찌 되었을까?
어느 날, 느긋하던 녀석이 갑자기 호들갑스레 ‘엄마, 엄마, 큰일 났어!’ 했다. 왜? 하니, 자기가 일반전형 접수를 안 했다는 거였다. 국립인 한국농수산대학에 특별전형 서류만 넣어 둔 상태였는데, 혹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일반전형이란 보험도 들었어야 하는 데 그게 오늘까지였단다. 그런 깜빡을 하필 그때 발견하다니. 안전장치를 놓쳤던 셈이다. 그날은 주말이었고 집이 학교에서 가깝다 보니 우르르 몰려온 친구들이 놀다 막 저녁 먹는다고 기숙사로 가고 나서였다. 오늘이 다 간 건 아니니까 지금부터 써서 12시 전에 넣으면 되는 거 아냐? 했더니 6시까지란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몇 분 남지 않았다. 난감하게 아들 얼굴을 마주 보며 그러게, 어쩌냐? 이미 마감이 되었으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기다려야지 뭐. 일단 기다려보자, 그렇게 말하고 저녁준비를 했다.
며칠 후.
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뜰 안으로 쑥 들어왔다. ‘어, 우엥이 왔어?’ 한달음에 달려가 둥기둥기 서로 부둥켜안고 흔들고 수염 자국 파릇한 아들 볼에 뽀뽀도 했다. 전날 저녁 아들이 한농대 떨어졌단 소식을 이미 들었고 처음 보니 반가웠다. 혹시라도 표정 어떨까 싶었는데 의외로 담담하고 밝았다. 가까이 바라보며 ‘아들, 기분이 어때?’ 하니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자연스레 아들의 손을 잡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있었는데, 흔쾌히 ‘아빠하고 농사지어야지.’ 하며 곁에 있던 아빠한테 ‘어이, 정 씨 아이씨(아저씨)! 나 무시하지 마, 나 이래 봬도 내년부터 이제 우리 집 농장의 동등한 대표, 동업인일세~~!’ 하며 하이파이브를 한다. 아빠는 얼떨결에 하이파이브를 당하고 말았다. 아, 뭐냐. 그렇게 빨리, 대표자리를 넘봐? 그러면서도 우리는 속으로 든든하고 흐뭇했다. 녀석이 가기 전에 ‘아들, 너 보여줄 거 있어’ 하고 이끌었다. ‘네가 심고 싶어 하던 계수나무 심었다. 너 떨어진 기념으로!’ ‘떨어진 기념식수는 아마도 처음이겠지?!’ 함께 어린나무를 바라보며 웃었다. 화창한 마음으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싱그러웠다.
그렇게 녀석은 고등학교 졸업을 했고 졸업식날 저금통장엔 천만 원이 모여져 있었다. 3년간 간식을 95프로 이상 끊고 용돈을 아끼고 모았고 그간 세뱃돈도 합쳤겠지. 우와, 숭악한 녀석 같으니라고. 녀석은 군 생활(이것도 집에서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이어서 짬짬이 주말농사를 도왔고)을 마치고 지금은 아빠와 농사를 짓고 있다. 2002년 월드컵으로 시끄러웠을 때 태어난 아들은 우리 나이로 25, 장골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난 독립적인 인간이다. 몇 달 전 집에 갔다가 아들 방 책상을 보니 현금이 수북하다. 곁에 있던 통장이랑 대충 보아도 5천만 원은 넘는 거 같다. 우와, 아들, 우리 식구 중에서 현금 제일 많은 부잘세, 대단합니다! 했더니 ‘그거보다 사실 좀 더 많아’ 한다. 가끔 쓸 때는 쓰지만 알뜰한 녀석, 올해는 제금 나기로 했으니 두고 봐야겠다.
향기가 좋아 계수나무가 좋다던 녀석, 어떤 향기를 품은 나무로 자라날지...
엄마는 계수나무의 하트모양 이파리와 붉은빛 나는 잎줄기, 새순의 색깔도 못지않게 좋아한단다. 잔소리 대신, ‘고마워, 어이쿠, 대단해, 감동이다’라는 말로 물 주며 키우다 보니 자기 삶에 독자적이다. 잔소리가 나와도 꿀꺽 참길 잘했나 보다.
어느새 계수나무와 더불어 든든한 농부로 자란 청년 농부, 너의 앞날을 푸르게 응원한다.
요렇게 실낱 같던 어린나무가
3년 뒤 이렇게나 자랐다.
#청년농부 #잔소리 #잔소리 대신 격려 #고마워가 키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