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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 한 모금

시 한 모금

12. 처음으로 맘 놓고 울었다

by 조유상

며칠 전, 우리 숙소에

한 달 살기 온 부부는

광주 토박이였다

그들과 모처럼 광주 5.18을 나누었다

짜게 절여 납작해진 기억,

오래 봉인된 세월을 열었다


스무 살, 대학 1년 생이던 우리는 탈춤반이었다

(그 부부는 중학생이었다고)

다른 학교와 연합해 동아리 합숙을 한 다음날 새벽,

선배들은 낮은 목소리로 우릴 불러 깨웠다


새벽 라디오를 듣던 선배들로부터

계엄이 뭔지도 모르며 눈곱을 떼던 우리,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계엄'이란 낯선 단어를 처음 들었다


5월의 서리처럼 계엄이 내린 그날,

우린 종로 5가 허름한 건물 4층 계단을

뿔뿔이 흩어져 내려왔다

허뚱한 도둑발길로 모두들 마음을 숨죽였다

거리는 쌔했고 개구리복 전경은 즐비했다


그 뒤로 대학은 정문마다 우릴 밀어냈고

우린 오갈 데 없이 나부꼈다

여차하면 지나가던 우릴 세워 가방을 발가벗기고

사정없는 뉴스들이 알 수 없는 암호처럼 지껄였다


시청 앞 뿌옇게 뻥뻥 터진 최루탄이

그리 눈코 뜰 수 없이 매운지 처음 알았고

전경을 피해 들어가려던 상가는

매정하게 우릴 거리로 내몰고 문을 닫아걸었다


눈물 콧물 범벅에 울면서

일면식도 없던 전두환을 목청껏 타도했지만

그는 멀쩡했고 광주는 눈물바람이었다


갑자기 폭도라는 이름으로 변신당한

광주시민들은 한쪽에서 죽어가고

한쪽에선 하얀 주먹밥을 나누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길 위에서 벌어졌다

믿을 수 있는 건 다 숨어버렸고

나쁜 소문만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우리는 독일서 온 슈피겔지를 더듬더

숨어서 돌려 읽으며

짐승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알게 되었다

치를 떨었지만 눈과 귀 막은 언론에

다수는 귀 멀고 눈멀었다

입조차 함부로 벙긋할 수 없는 숨죽인 세월


아무도 함부로 믿으려 들지 않았다

쉬쉬하는 세월이 길었고

목이 컥컥 메어오는 아픔은

광주에 연고 하나 없는

나 같은 이에게도 깊고 길었다


4십 년 후 우리 아이들은 광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

광주에 가 보고 광주를 듣고 공동묘지를 다녀온 뒤

비로소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5.18 이후 오래 아파왔고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5월이면 남몰래 가슴에

멍울 같은 통증이 뻐근해 왔다


농사를 지으며

흙을 만지고

생명을 어루만지며

통증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아무 연고 없는 내가 그런데,

광주에서 붉은 현장을 만나고 겪은 이들은...


4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광주 사람을 만나 광주이야기를 나누며

봇물 터지듯 눈물이 하염없이 솟았다


살그머니 깃든 제주라는 땅은 전체 인구 대다수가

한치 건너면 거의 4.3 희생자 가족이라 했다

광주와 제주는 그렇게,

얼룩진 아픔으로 닮았다


아픔은 가슴에 묻어두었는데

솟는 건 눈물이다

눈물로라도 솟으니

한 발작을 떼며 살아간다


그날, 처음으로

맘 놓고 함께 울었다

전쟁이 어떤 건지 겪어 본 사람이 알듯

계엄이 어떤 건지 우린 겪어 본 일상이었고

그 일상은 뒤집힌 거울이었다

물속에 비친 양 흔들리는 거울


두 손을 부여잡고 흘린 눈물에

서로가 어룽거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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