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갔다 올게”
아침에 아내가 출근한다고 말을 하며 현관으로 나간다.
“응, 잘 갔다 와”
힘없는 목소리로 내가 대답한다. 은퇴 전에 나는 더 일찍 출근했다.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남자는 동굴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굴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하는데 자기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고 정서적 안정을 취하는 장소이다. 은퇴하면 가장 큰 문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어디라도 좋으니 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친다 ‘유레카! 우리 집에는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지하실이 있었지.’
어두침침한 지하실. 바닥은 오래된 흙먼지가 수북하고 입구에는 30와트 조그만 백열등 한 개가 줄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 다행히 반 지하라서 세 개의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있다. 어두운 바닥에 핀 조명처럼 창문 모양이 가지런하게 그려져 있다. 오래된 도배지가 너덜너덜 나풀거리고 곰팡이도 잔뜩 끼어 낮인데도 귀신이 나올 환경이다. 비가 올때 방치만 한 곳이라 물을 머금은 바닥과 벽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떻게 하지, 엄두가 나질 않는데 그래도 ‘희망은 이곳밖에 없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마지노선이다. 무조건 만들어 내야 한다. 고 흔들리는 나를 재촉한다. 일단 한 번 해보자’
삽과 빗자루, 마포 걸레를 준비한 다음 삽으로 켜켜이 쌓인 흙과 먼지를 긁어낸다. 몇 시간이 흐르면서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다. 작전상 후퇴.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님을 직감한다. 며칠을 시간과 체력이 되는대로 흙을 담은 자루들을 버렸다. 바닥을 긁어내고 쓸어낸 다음 마포 걸레에 물을 듬뿍 묻혀 바닥을 닦기 시작한다. 금세 시컴해진 마포 걸레는 1미터 나가기가 무섭게 빨아 줘야 한다. 한참을 닦고 나니 서서히 바둑돌처럼 흰색과 검은색의 격자무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넓은 바닥이 나름 자기 색깔을 뽐낸다. 더러 무늬가 훼손된 곳도 있고 일어난 곳도 있지만 대체로 말끔해졌다.
다음은 귀신이 나올 법한 벽. 너덜너덜한 벽지들을 뜯어냈다. 물을 머금은 벽지들은 힘없이 벗겨 내어진다. 문제는 속지, 벽과 일체가 되어 끔쩍을 않는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가며 공구용 주걱으로 긁어내야만 벗겨진다. ‘와! 이건 바닥보다 더 힘든 일이다’ 사다리를 이용해 윗부분부터 조금씩 긁어내야만 하는 벽은 바닥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여러 날이 흘러갔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조금씩 ‘언젠가 끝이 나겠지’ 마음먹는다. 서두르지 않았던 벽 작업도 마침내 마무리가 되었다. 괜시리 울컥한다. 그동안 쓸고 닦고 벗긴 시간 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흰색 수성페인트를 잔뜩 준비하고 페인트 롤러를 가지고 벽을 칠하기 시작한다. 여태 했던 작업에 비하면 페인트칠은 식은 죽 먹기다. 음악을 틀어 놓고 그림 그리듯 칠하고 한 번을 더 덧칠한다. 환해진 지하실 공간은 그럴싸해졌다. 천장은 요즘 유행하는 카페들처럼 시멘트벽 그대로를 살려 두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어울리는 조명을 구입했다. 전기 작업에 능숙한 형의 도움을 받아 열 개 정도의 조명을 일 미터 정도 대롱대롱 매달아 단다. 앙증맞은 갓이 조명을 감싸고 열을 맞춘 등들이 군기 든 사병처럼 절도 있게 매달려 있다. 드디어 불을 켠다. 이것은 내가 보았던 어떤 실내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나의 땀과 눈물을 가져갔던 고된 작업과 함께 무엇보다 빛나는 나의 공간이 드디어 마련된 것이다. 감격스럽다.
가장 먼저 설치한 것은 골프 연습장이다. 한겨울에 야외 연습장에 나가 꽁꽁 언 공을 골프채로 치는 것은 공에게도 채에게도 못 할 짓이다. 특히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연습하는 것도 힘들고 날씨가 뚝 떨어지거나 눈이라도 오면 한동안 연습을 하지 못한다. 온라인에서 산 야외 개인 골프 연습장을 한쪽 구석에 설치하고 시타를 해본다. 그럴싸하다.
영화 속 집 안에 당구대가 있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친구들과 담소하면서 여유 있게 음료를 마시며 치는 상상을 해본다. 그래 다음은 당구대이다. 온라인에서 구매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설치다. 당구대와 주변 물품 등을 사는 것보다 설치비가 훨씬 비싸다는 것에 놀랐다. 당구대는 여러 부품과 특히 바닥이 무거운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인부 두 분이 힘겹게 배달을 하고 다음에 설치 기술자 세 분이 와서 조립과 수평을 꼼꼼히 체크해 설치해 주었다. 큐에 초크를 멋지게 바르고 툭 쳐본다. 영화다.
중학생 때부터 탁구를 열심히 재밌게 쳤다. 고등학교 때는 방과 후에 심심치 않게 친구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탁구를 쳤다. 내 딸 둘은 초등학교 다닐 때 탁구 선수로 뽑혀 당진 대표로 충남체전도 참가했다. 한 가지 구기 종목을 탄탄하게 배워 둔 것은 좋아 보였다. 당구대가 있는데 탁구대가 없다는 것은 우리 가풍이 용납을 못한다. 탁구대 설치는 너무 간단하다. 주문하고 조립한 것을 펴기만 하면 끝. 그림이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LP판을 하나씩 사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다. 스콜피언스, 토토, 캔자스, 스모키. 그때는 가요보다는 팝송이 절대적이었다. 이십 대 직장을 다닐 때는 한동안 클래식에 심취했다. 그렇게 하나씩 모은 천 장 가까운 LP판을 가보처럼 지금까지 끌어안고 있다. LP가 단종되고 CD로 넘어왔다. 들국화, 한영애, 이승철, 봄 여름 가을 겨울, 서태지 등은 LP판과 CD가 공존하는 가수들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반은 거의 다 소장하고 있다.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면 아내는 항상 볼륨을 줄여달라고 한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해 큰 소리가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 것은 소리의 크기에 달려 있다. 드디어 나만의 리스닝 공간으로 이사 갈 때가 됐다. 낑낑 매며 오디오 장비와 LP판과 CD, 장식장 등을 지하실로 옮겼다. 볼륨을 크게 하고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틀어 본다. ‘꽝꽝꽝꽝 꽝꽝꽝꽝’ B&W 스피커에서 내뿜는 소리는 물리적으로 내 가슴을 때린다. 미친다.
음악을 듣기 위해 오디오 장비를 성실하게 설치했다. 요즘 대세는 유튜브이다. 무엇이든 쉽게 찾을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것, 궁금한 것들을 세세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다. 넷플릭스와 OTT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골라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에 비디오가 없다는 것은 갓을 쓰고 양복을 입는 격이다. 또 온라인에서 열심히 TV를 검색한다. 가장 큰 사이즈로 TV를 설치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 암막 커튼 설치한다. 깜깜하다. 인터넷을 연결하고 넷플릭스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를 접속한다. 바람 소리, 말발굽 소리가 당장이라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것 같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영화관이 따로 없다.
사진을 찍은 것들은 왼쪽 벽을 도배하고 그림을 그린 것들은 오른쪽에 벽에 걸어 둔다. 몇 년 전부터 당진 예술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드럼을 연습하기 위해 한쪽 귀퉁이에 드럼 장비를 구비해 두었다.
아침에 아내가 출근할 때 나도 지하로 내려간다. 제일 먼저 팔을 스트레칭하고 드럼 스트로크 연습을 시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라디오 헤드의 ‘Creep’을 연주하며 나만의 솔(soul)에 젖어 든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라고 역설했다. 나는 행복의 빈도를 위해 나의 생활 들을 살라미 전술로 즐긴다. 인생 뭐 있냐. 내가 만족하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