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졸업 사진 찍기 전날 날 두들겨 팼잖아."

by 계영배






어느 날 중학교 아들이 수학 문제를 푸는 데 도와달라고 해 공부하고 있는 아들에게 갔는데 언제나 책상 한쪽에 떡하니 잘 세워져 있던 아들의 유치원 졸업 사진이 그날따라 넘어져 있어 다시 세워 놓으려는 순간 문득 유독 부어 있던 사진 속 아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너 저 때 왜 저렇게 눈이 부었니? “

하고 내가 물으니 아들이 답한다.


"엄마가 졸업 사진 찍기 전날 날 두들겨 팼잖아."

“설마.... 진짜? 엄마가 널 두들겨 팼다고? 뭔 소리야."

"엄마 생각 안 나? 내가 막 발 구르고 악쓰면서 운다고 방에 끌고 들어가서 맞았잖아."

”에이 설마.... “








당황한 나는 수학 문제를 알려주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아들 방을 나왔다. 내가 설마 당시 7살짜리 아들을 아들 말처럼 '두들겨 팼었'을까..... 당시 상황에 대해 당최 하나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내 굳은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나나 남편과는 다르게 정말 순하고 착하며 인정 많은 성향을 가진 아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집 식구 세 명 중 가장 어른스럽다. 우리 아들 같은 아이가 절대 그런 일로 없는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물론 얘도 사람인지라 언제 어느 경우에 혹여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당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은 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했던 상황이어서 아이가 내 질문을 듣고는 갑자기 ”엄마한테 혼난 것“도 ”야단을 맞은 것“도 아닌 ”두들겨 팼다. “라는 그간 우리 아이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과격한 표현을 내게 난데없이 쓰면서 말할 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당시 상황에 대해 그런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급 흥분하며 묘사한 건 그때 상황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정말 아이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이유였을 테다.








아이의 대답을 들은 내 머릿속이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미운 7살' 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미운 4살. 미친 7살' 이라고도 하던데 뭐가 되었든 지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인 우리 아들과 나지만 (이건 순전히 엄마 입장에서 본 '현재 우리 관계 상태에 관한 진단'이긴 하다. 무튼) 사실 7살 때는 좀 힘들었었다.








한글은 떼어야 학교에 가서 바보가 안될 텐데 영어 유치원에서 영어만 쏼라쏼라 했지 게다가 만다린까지 배워서 "이얼싼쓰 우류 찌빠~~" 숫자 노래부터 뭐라고 뭐라고 나는 들어도 모르는 수많은 중국어 노래들은 신나게 불러 댔지만 당시 무엇보다도 초등 입학에 필수요건이었던 한글 떼기는 아직 까마득했던 아들 덕에 사실 가뜩이나 누구는 밖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나는 맨날 집에서 띵까띵까 놀면서 돈이나 쓰고 댕긴다고 ”다음 생에는 너로 태어나고 싶다 “면서 비아냥거리는 남편에게 아이를 정말 보란 듯이 잘 키워가지고는 남편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이건 뭐 날이 갈수록 돈은 돈대로 들고 티는 좀처럼 안나는 것 같아 불안이 아주 그냥 디폴트 값으로 탑재되어 살아가던 나에게 급 자아가 성장한 데다 어쩐 일인지 힘도 마구 세진 7살 아들은 매일매일 내게 레슬링 ’ 그레꼬로망 형‘의 대상이었다.








사실 아들은 '팩트 폭격기' 남편과의 격정적인 결혼생활에서 언제나 내가 조금이라도 우울해 보이면 나를 마치 어른이 하듯 의젓하게 위로해주고 ”엄마 사랑해. “ 를 그냥 남들이 보든 말든 시도 때도 없이 외쳐주며 좌우지간 이건 뭐 딸도 아닌 것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게 무한한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던 탓에 나의 녹록지 않았던 삶에 마치 한줄기 빛 같았던 아이였다.







그러던 아들이 갑자기 예민해지고 반항적이 된 7살이 내게는 참 힘들었는데 그에 더해 나도 애 놀이 학교 때부터 시작된 아들 유치원 엄마들과 '유치원 끝나고 놀러 댕기기' 라이프에 대한 열기도 어느샌가 차츰 식게 되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선 ’ 이젠 누구 엄마로서의 삶 말고 나 자신으로써의 삶을 좀 살고 싶다.‘는 마음이 막 불끈불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즈음 아이와 또 밀라노에서 유학하는 남동생과 함께한 유럽 여행은 출산과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7여 년을 집에서 애만 키우던 내 맘속을 마구 휘저어 놓았다.








사실 동생 유학 갈 때는 크게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아직도 열쇠로 열고 들어가고 천창이 있어 집에서 하늘을 볼 수 있었던 데다 우리처럼 변기 일체식 비데가 아닌 마치 변기가 두 개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재미있는 비데가 있는 화장실을 가진 동생의 밀라노 집부터 차도 없이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차를 타고 갔으면 놓쳐서 너무 안타까웠을 아름다운 거리들과 가게들 등 밀라노에서의 모든 생활이 다 왠지 신기하면서 멋져 보였다.








나도 한때 일 좀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출산 후엔 그냥 매일 밥하고 청소하면서 그저 집에서 이른바 ’ 솥뚜껑 운전‘이나 하는 전업 주부 아줌마였던 나는 사실 전업주부를 비하할 마음은 전혀 없으나 당시 ’ 검소함과 저축력을 겸비하지 않았던 전업주부‘여서 상시로 욕을 먹고살았던 때라 그랬는지 어쨌는지 ’ 전업주부‘라는 단어가 왠지 내게는 ’ 무능‘을 대표하는 단어로만 느껴졌었다.









집을 아무리 깔끔하게 치우고 예쁘게 단장해도, 철저한 유기농 식단으로 남들은 심지어 아토피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아토피인 아들을 스테로이드나 약 한 번 안 쓰고 철저한 식단관리와 갖은 노력으로 잘 키우고 또 공부도 열심히 시키면서 나름 잘 키운다고 해도 애가 뭐 어디서 대단하게 뻑적지근한 상을 받아 오지 않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고, 또 나름 시부모님께 NO 한 번 안 해보고 나름 잘한다고 하면서 고부간의 갈등 같은 것은 만들어 본 적도 없다 해도 결국 이상적인 전업주부의 기본값으로 일컬어지는 ‘저축력’과 ‘검소함’을 겸비하지 못한 전업주부였던 나는 언제나 부족한 아내였고 따라서 절대 을(乙)이었다.








남편 친구들은 술자리에 가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도착하면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술자리가 끝나 일어설 때까지 ‘돈 한 푼 못 벌면서 눈만 높아 다 늙어서 무슨 유학을 간다고 하질 않나 애 옷은 또 얼마 짜리를 사줬고 제일 비싼 영어유치원에 보냈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아주 매번 풍부하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술이나 마시고 안주나 먹 다오면 되었다고...








이렇게 출산 전 나름 화려한 곳에서 일하면서 돈 좀 썼던 가닥이 있어 눈은 높은데 저축에는 영 소질이 없는 터라 남편이 벌어다 주는 족족 아주 알뜰하게 다 써재끼는 통에 결국 '돈도 못 버는 게 눈만 높다." 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사는 삶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내 삶에 변화가 진심 필요하다고 느꼈던 나는 ’나', '진정한 트루 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그래 남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웬만한 건 눈에 차지 않았다. 안사면 안 샀지 눈에 차지도 않는 것들을 아이에게 해주기도 싫었고 나도 가지기 싫었다. 그런 병증은 물건뿐 아니라 나의 지적 허영에도 그 마수를 뻗었는데 남편 말마따나 돈 한 푼 못 벌면서도 나는 디자인적으로나 기능성 면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물건들을 탐하기 일쑤였고 학점 1.83으로 대학을 졸업한 주제임에도 불구, 좌우지간 나의 지적 허영의 정도도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패션은 무지 사랑하지만 그 흔한 샤넬 백 루이뷔통 백 하나 없던 나는 조금은 특이한 여자 사람이었다. 혹 돈이 진짜 남아돈다면 모를까... 그들은 이상하게도 나를 크게 흥분시키지 못했던 탓에, 당시에는 뭐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가지고 싶지 않았었고 그보다 같은 돈으로 내게 더 큰 흥분과 가슴 뜀을 주는 일은 신기하게도 세상에 널리고 널렸었다.








특히 기능성을 겸비한 아름다운 디자인과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에 제한된 재원 안에서 내게 더욱 큰 기쁨을 주는 국내외의 각종 전시나 박람회에 가기를 즐겼었는데 그 외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라도 흰 셔츠를 입고 있을 때 와락 껴안는 것을 아주 경기할 정도로 옷을 사랑했던 나는 유명 디자인을 카피한 보세 옷을 입고 샤넬 백을 들기보단 티셔츠 한 장을 사더라도 관심 있는 디자이너의 제품을 구입해 그 디자이너의 디자인 철학과 남다른 소재 사용이나 패턴 적용처럼 그 디자이너만의 고유의 아이디어를 매번 입을 때마다 재발견하며 착용하기를 즐기는 등 예술과 디자인 관련 분야 ‘경험’을 구매하는데 지출하는 것을 택했다.(물론 나도 명품백 사용 경험도 좋아한다. 이것저것 다~~~ 경험하고 누리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남들은 모르겠으나 유독 ‘경험 욕심쟁이’였던 나는 매번 선택해야 했고 단지 앞서 밝힌 친구들이 내게 더 큰 기쁨을 주었기에 난 갸들을 더 선호하곤 했다)








또한 각종 식재료 등에도 관심이 많았던 나는 전 세계의 각종 식재료를 다양하게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백화점 식품코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한 번 들르면 장시간 머물곤 했는데 이렇게 또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관심들은 관련 역사에 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등 예술이나 패션을 비롯 나의 관심 분야에 관한 호기심은 관련 학문에 관한 관심으로도 이어지며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지적 허기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자양분으로 기능했다.








그런 날 보고 남편은 쟤는 명품백을 사 들고 다니면 티라도 나지 그런 것도 아니고 돈을 어디다 쓰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며 영 마뜩지 않다는 듯 반감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소위 돈도 안되고 당최 티도 안 나고 크게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일들에 좌우지간 크게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그래서 남편 말마따나 좌우지간 ‘희한한 여자’ 였던 나는 저 자신도 가끔 ‘아... 내 눈을 뽑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지금 현재 대한민국 경기도 어느 산밑 아파트에서 그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조용히 애나 키우고 살림이나 하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꿈은 너~~ 무 크고, 하고 싶은 것도 너~~ 무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던 경력 단절 근 7년 차 전업주부 아줌마였던 것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나도 누군가 내게 일을 맡겨준다면 정말 잘할 자신이 있는데... 비록 현재 포지션은 ‘24시간 풀타임 전업주부’ 포지션이지만 언제나 가슴 뛰는 현장에 투입되어 이 한 몸 불사르길 간절히 기다렸던 나는 어느 날 남편과 한바탕 하고 급 호흡곤란이 오면서 과거 공황이 심했을 때가 떠올라 ‘이렇게 죽느니 아들과 일단 여기를 좀 떠나보자.’는 생각에 급 떠났던 3박 5일 일본 여행에서도 여행 중 찍은 수 천장의 사진을 (물론 우리 아들 사진도 많았지만) 남다른 디자인으로 유명한 일본의 상업 공간과 식공간 푸드 디스플레이 등에 관한 사진으로 가득가득 채워오기도 했는데 좀 더 자유로운 느낌의 런던이나 파리, 밀라노와는 달리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힙한 느낌의 또 다른 깊이를 보여주는 특히 푸드 부티크 샵들과 긴자 일대 미츠코시 등 백화점 식품관의 푸드 디스플레이 솜씨들은 기가 막혔다.








보통 예쁘게 혹은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위해 심지어 먹지 못할 각종 약품들을 바르기도 하면서 얼마든지 멋지게 연출 가능한 음식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과는 달리 손님이 원하면 언제나 그 즉시 팔려나가야 하는 음식을 위생적으로도 절대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고 또 바로 섭취가 가능한 그 음식만의 최적 상태로 보관할 수 있는 환경이면서도 시각적 즐거움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는 푸드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도쿄의 여러 상점들이 보여준 훌륭한 퍼포먼스는 날 흥분시켰고 나는 마치 약에라도 취한 듯 일본 디자인 씬이 보여주는 높은 완성도에 취해 아무도 출장을 안 보냈는데 혼자 출장 온 김대리 마냥 ”엄마~~ 왜 계속 나는 안 찍어주고 다른 것만 찍어~~~. “ 하며 징징거리는 아들을 달고 돌아다니면서도 찍고 또 찍곤 했다.









이렇게 당장 낼 출근할 곳도 클라이언트도 없는데 항상, 상시 누군가를 위한 PT를 준비하고 있는 다소 정신 나간 뇌구조를 가진 채 생활하던 나는 사실 나도 그냥 남들처럼 애 친구 엄마들이랑 새로 생긴 맛집에 밥이나 먹으러 다니고 쇼핑이나 하러 다니고 그러면 신나고 재밌고 또 가끔은 남편한테 가방이나 사달라고 애교도 부리고 그러면서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들면서 가끔 우리 남편이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엄마도 시어머님도 모두 전업주부셨는데 그냥 전업주부로 살면 어때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편은 아니니 그냥 집에서 아이 키우고 남편 내조하고 집안 예쁘게 꾸미고 아니면 쇼핑도 좀 하고 몸짱 아줌마 이런 것들도 유행이니 내 몸 예쁘게 가꾸는데 기쁨을 얻고....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군상인지..... 좌우지간 당최 그런 것 만으로는 만족이 안되었다.









그럴 거면 진작에 학교 다닐 때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석사 박사 따면서 주욱 공부에 매진을 해오든지 이건 뭐 날라리로 실컷 놀러 다니며 하루살이처럼 살다가 갑자기 웬 공부바람이 불어 난데없이 급 심각한 척을 하니 남편이고 식구들이고 다들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두서라곤 없이 정신없는 뇌구조로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하던 시기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변에선 지인들 역시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실컷 같이 신나게 놀러 댕기며 잘 살다가 혼자 갑자기 해골물을 먹고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 모양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둥 그러는 내게 지인들은 조금은 의아한 불편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차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고 나의 인생의 '챕터 2'를 마구 구상하며 현실과 끊임없는 협상, 분쟁. 싸움 중이었던 때에 그때 우리 아드님은 마침 미운 7살이셨고 우린 좌우지간 무지하게 싸웠다. 누군가 아이가 초등 일 학년이면 엄마도 딱 초등 일 학년의 정신 연령을 가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들과 레슬링을 하던 그때 정말 진지했고 훈육을 이유로 체벌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반항하는 아들의 팔을 잡았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처음엔 엄마로서 훈육을 위해 아들의 팔을 잡았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기 싫은 거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긴 한데 정말 아들이 힘이 너무 세져서 놀람과 동시, 나는 그때 누구 말마따나 딱 7살이었다. 지기 싫었다.








'엄마가 다 너 위해서 하라고 한 일인데.... 그런 일을 안 하겠다며 그렇게 악을 쓰고 우는 너를 '사랑의 매 '라는 미명 아래 체벌을 할 수도 있지만 엄마는 절대 그러고 싶진 않아서 처음 대화 시작 때부터 정말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누르면서 지금 이렇게 네 팔을 꽉 잡고 있는데 엄마는 너 밖에 없는데 넌 왜 엄마의 그런 맘을 몰라 주니....’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래서 아들을 꽉 잡고 있는데 막 땀이 났다. 그런데도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여기서 이 힘겨루기에서 지기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그까짓 한글을 좀 더 늦게 떼어도 숙제를 안 해도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고 큰일이었을까 싶은데 그때 성인의 몸이지만 누구 말마따나 7살 정신 연령을 가졌던 나는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내 삶에 대한 불확신과 두려움이 아이에게 갔어야 할 여유를 다 잡아먹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훈육과 화풀이는 회수권 한 장 차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SKY 등 소위 과하게 멀쩡한 대학 졸업한 자식이 삼성 등 대기업 대신 무슨 검색엔진이나 게임회사에 취직한다고 하면 부모님 중 팔 할은 뒷목을 잡으셨을 거다. 그러나 이젠 세상이 변해 언젠가 뉴스를 보니 2020년 기준으로 대학생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기업 1위는 카카오이고 2 위가 네이버 그리고 CJ제일제당, 삼성 전자 순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순위의 앞뒤야 엎치락뒤치락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때 그 유명했던 삼성전자나 LG는 어디 가고 1,2 위에 나란히 카카오와 네이버 등 내가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따라서 삼성전자 등 기업력도 오래되었고 또 탁월한 이미지 관리로 오랜 기간 취업 선호 회사 리스트 상위권에 랭크되었던 회사들 입장에선 소위 '족보도 없는 회사' (물론 카카오나 네이버 모두 삼성 SDS 출신들이긴 하다 - 삼성이 결국 호랑이 새끼를 키운 것인가)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시대에 과연 내가 아들을 훈육하며 끊임없이 부르짖었던 그 ‘널 위한’이 우리와는 달리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진짜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갈 세대’인 ‘아들, 널 위한’이었을까








그냥 아들이 원했던 대로 아들이 좋아하는 코딩이나 롤 블록스 Roblox나 실컷 하도록 놔두고 요즘 존 리인가 투자전문가가 여기저기 나와서 애들한테 다른 것 말고 주식을 사주는 것이 진정한 자녀사랑 이라며 아주 열변을 토하시던데 안철수 대표가 큰 수익을 냈다던 또 아들이 아니었음 전업주부 아줌마가 존재 자체도 몰랐을 롤 블록스 주식이나 당시 지금보다 훨씬 쌀 때 잔뜩 사줬으면 지금 아들이 엄마 소원대로 몇 년을 뼈 빠지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 벌 몇 년 치 연봉보다 더 큰 수익을 내 엄마처럼 매번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할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유가 이미 확보된 상태에서 나 자신의 안위 만이 아닌 좀 더 범인류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위해 나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보다 진보된 삶을 계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도 물론 자아실현도 있으나 결국 경제적 안정을 위한 준비 부분도 엄청 큰데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에서 그저 남들이 그 시기에 다 해야 한다니까 특정 시기에 한글 떼기를 닦달하며 그렇게 남들과는 다르게 앞서 가시는 진취적인 엄마 시라면서도 또 어떤 부분은 줏대 없게도 남들이 가야 한다고 종용하는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는 특정 분야에 밝은 아이를 그저 믿어주고 지켜봐 줘야 옳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 뭐 이런 말이다.








하여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동안 입만 살아서 혼자만 오지게 진취적인 양 떠들어 댔던 내가 정말 아들의 말처럼 아들과의 팔씨름에서 지고는 그 민망하고 모양 빠짐을 못 이겨 어디 가서 옷걸이라도 가져와서 아들 말처럼 두들겨 팼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티브이에 나오는 자식을 때리는 엄마랑 대체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티브이에서 학대받았다는 아이들 뉴스를 접하고는 '어머 어쩜 저럴 수가 있어." 그러면서 나는 마치 전 ~~ 혀 일도 상관없는 그저 언제나 아이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엄마인척 했던 것은 아니 었었는지.... 그러는 사이 어느덧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한글도 다행히 떼어주고 나도 진로를 정해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이의 미운 7살도 끝나고 나도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스위트한 아들 바라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들이 말한 그게 진짜였다면 엄마랑 심적 절연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직 너무나도 착한 엄마 아들로 살고 있는 우리 아들에게 무얼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어쩌면 이제는 엄마보다 훌쩍 커버려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아들이 그저 맨날 참 '나' '진정한 나의 자아'를 찾겠다며 아등바등 하루하루 버티기를 하며 살고 있는 쬐깐한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 사람'이 안쓰러워 봐주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치과의사 이수진 님의 엄마에 관한 기억은 슬픔이 8할이었다. 나보다 남동생을 사랑했던 엄마, 내가 심적으로 어려울 때 기댈 틈을 주지 않았던 엄마,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음에도 딸에게 경제적 지원은 심하게 몸을 사렸던 엄마.... 7살짜리 아들을 한글 공부를 등한시하고 엄마한테 소리 지르며 대들었다고 (아들 표현을 빌자면) ‘옷걸이로 두들겨 팬’ 나도 당시 우리 아들에게 더하면 더했지 덜한 엄마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혹여 변명 같이 들리더라도 사실 많은 엄마들은 아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그만의 고통들을 다 가슴에 품고도 여지없이 해가 뜨면 아무 일 없는 듯 밥을 하고 집 청소를 하고 시댁 식구들을 대하고 경조사를 챙기고 또 아이 숙제를 봐주고 오다가다 만나는 지인들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환하게 인사를 하며 안부를 묻고 하며 산다.









수진님의 어머니도 의사부인으로서 사회적으로는 안정적인 계층의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 어떤 슬픔을 지니고 살아오셨을지 아무도 모르고 또한 우리는 상대방의 경제적 여유를 이유로 상대방의 슬픔을 덤핑 처리하려는 경향이 만연한 것은 아닌지...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에게 심적 상처를 크게 남긴 수진님 어머니의 양육태도는 문제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같이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옛날엔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해다면 이젠 아무리 상황이 그렇더라도 어른스럽고 이성적으로 행동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엄마를 같은 여자 사람으로서 안쓰럽게 생각해주는 것은 어떨까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단죄하기보단 그럼에도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이수진 님 본인의 삶에 좀 더 집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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