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나의 소중한 인생

by 벨 에포크

《The Belle Epoque》

: 벨 에포크

프랑스어로 '좋은 시절'이란 뜻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찬란했던 프랑스의 예술 사조들을 빗댄 단어라고 한다.

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뭔가 폭발적으로 발전했던 그 시절의 에너지도 좋고 혁명적인 산업 발명은 물론이고 시민 의식이 생겨나고 예술과 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운 그 시절의 낭만이 내게는 그저 부러운 까닭이다.


누구에게나 과거의 영광이 있고 찬란했던 시절이 있다.


지금은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여념이 없는 평범하고 조금은 헐렁한 주부지만 나도 한때 소위 "잘 나갔다"라고 말할 수 있는 20대 시절이 있었다.

주변에는 늘 친구들과 사람들이 있었고, 꽤 괜찮은 보수의 캐리어도 있었고, 나름 트렌드에 발맞춰 멋도 부리곤 했었다.

그러다 한국의 지루하고 평범한 클리셰지만 지금의 남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모든 걸 정리하고 주부로 그리고 애들 엄마로 살고 있다.

지금은 친구들과 연락 오간 지 감감하고, 남편 외벌이에, 화장품이라고는 애들 목욕하고 나면 바디크림 발라주고 손에 남은 크림 쓱쓱 비벼 얼굴 한두 번 쓸어내리는 정도가 다인 게 현실이 된 나.

지금이 후회된다는 건 아니지만 옛날에 내가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


얼굴은 또 얼마나 철판이 되었는지.

매일 마주치던 이웃 아주머니께 인사만 해도 부끄러워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던 유리 멘탈은 어디 사라지고 길가던 사람도 붙잡고 큰소리로 말 거는 요즘 내 모습에 나도 가끔 놀라울 따름이다.

한 때,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던 그 자유로움은 사라지고 내일 일과를 분단위로 스케줄을 짜고 다이어리에 세세하게 계획하는 내 모습이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다 요즘 그런 내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세상에 닳고 닳아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나의 모습인 것만 같아서.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서.

원래 난 안 그랬는데 언제 이렇게 변했지...

하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집안일에, 첫째 하교 후 학원 픽업하고 둘째 학교와 치료실 픽업을 끝내고 부랴부랴 장을 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정리하고, 애들 숙제 체크에, 꼭 해야만 하는 애들 저녁 산책, 그리고 애들 샤워까지 끝나야지만 내 일상도 끝나는 하루 일과들.

반복되고 피곤한 일상이지만 그 사이 생긴 웃기거나 웃지 못할 순간들을 경험하며 그 일상을 한 마디씩 툭툭 던져가며 가족들과 나눈다.

이렇게 나의 일상을 적어보니 참 평범하다. 평범하기 그지없다.

특별한 거 하나도 없는 그냥 평범함 그 자체다.

웃음이 피식 나온다.

평범하기 힘들다는 요즘 세상에 세상 평범한 나의 일상이 왠지 싫지 않다.


어느 영화의 명대사처럼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한다.

한 때 이 단어가 내 생애 신조와도 같았었다.

근데 너무 충실하게 살았는지 가끔 인생이 지친다.

나는 나름대로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처절하고 치열하게 그렇게 매일을 참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었다.


가족 모두 큰 우환 없이, 어디 크게 아픈데 없이, 그날그날 적당히 고달파도 버틸 수 있는 하루.

엄청 가파르지 않아도 제법 기운 언덕배기를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는 "벨 에포크 "가 아닐까?

돌아가고 싶은 영광의 과거가 아닌 화려하지 않아도 다채롭지 않아도 지금이 사실은 소중한 나의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특별하지 않아도 멋있지 않아도 조금은 궁상맞아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오늘 하루가 나의 소중한 벨 에포크이다.

그래서 "벨 에포크; 좋은 시절".

이 단어를 나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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