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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별 Nov 27. 2023

집 6화-한옥을 사다.

   

아이들에게 돈 들어갈 일이 없어져 저축하는 재미가 생겼다. 남편도 정년퇴직 하던 그해 봄에 일자리를 얻어 소소한 벌이나마 일을 하고 있다. 집에서 놀면 뭐하느냐다. 젊을 땐 틈만 나면 나가 놀기 바쁘던 사람이 집 구석에 있는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주말이면 경동 시장 노량진 시장을 가 먹고 싶은것들을 사 왔다. 감흥 없는 여보 사랑해를 남발한다. 세월이 가져다준 변화다. 남편은 이젠 더 이상 집을 사지말라지만 또 집을 사고픈 심리가 발동했다. 강화 양평을 돌아다니던 것을 멈추고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은퇴 후 고령자 취업으로 고용노동부 산하 고용센터에서 직업심리검사 업무를 일년간 했다. 내 담당 구역은 반포 방배 지역이었다. 초중고를 방문해 진로 적성검사를 하고 일반인 검사도 한다. 검사 결과지를 출력해 우편으로 학교에 보내준다. 적성 검사차 갔던 학교 중 세화여고 분위기가 가장 좋았다. 가히 명문이라고 부를 만 했다.     

 중학교를 갔다. 북한 김정일도 이 아이들 무서워 못 쳐들어 온다는 중학교다.      

“학부모님들, 이곳에서 매일 일하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알고 계셔야 합니다. 간 쓸개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이미 사라졌을테니까요.”     


직업 적성 검사를 했던 사람중 회사를 10 년 다니다 그만 둔 사람이 있었다.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그만 두었고 앞으로 무얼 해야할지 몰라 이곳 직업 적성 검사를 했다. 모든 영역에서 90% 이상 뛰어난 능력을 나타냈다. 내가 근무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다. 이 분은 참으며 일하던중 어느날 회사 입구 회전문을 들어서는 순간 회전문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몸도 덩달아 하늘과 땅을 도는거 같다가 그만 쓰러졌다고 한다. 뛰어난 능력자이니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말로만 듣던 삼식이 아저씨가 왔다. 정년퇴직까지 성실히 일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퇴직하고 집에 있으니 아내가 불만이다.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여태 잘 산 아내는 이제 남편을 챙겨줘야 한다. 하지만 아내는 만나오던 친구도 못 만나고 취미생활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고 구박한다. 이기적이다. 남편이 아프면 버릴건가. 이 남자는 혼자서 점심밥을 밖에서 사먹어야 하는게 곤욕이다. 돈 보다 점심 같이 먹을 동료가 필요했다.      

고용센터의 주 업무는 실업급여와 취업 지원이다. 취업을 돕는 일환으로 직업 적성 검사를 하는게 내 업무였다. 하루 5시간 근무 월급은 60만원이었다. 직원 절반이 월급 100만원 미만의 계약직이었다. 고용노동부의 아이러니다.     


출장차 갔던 동네중 반포 동네가 참 좋았다. 저층 아파트 동과 동 사이가 넓고 오래 된 나무들이 즐비해 마치 공원같았다. 벚꽃이 흐날리던 날 벤치에 앉아 있으면 무릉도원이 여기로구나. 집 보러 다닐 때 여기도 갔다. 내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출과 전세금을 이용할 생각은 못했다. 나중 이 곳 아파트는 3배가 올랐다.      


계약직 근무 중 좋아 보이던 방배역 동네를 갔다. 부동산을 가면 매물이 없다는 말을 했다. 나오자마자 팔린다고 한다. 매물 안내도 해주질 않는다. 번지를 받아 지도 검색을 해 나혼자 찾아 다녔다. 가난해 보였나보다. 매물 나오면 연락 달라고 했으나 한군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원 주택 같은 단독 주택을 사고 싶었다. 감히 강남지역은 가지 않았다. 교대 역 서초동을 갔다. 조용한 분위기에 예쁜 주택 단지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 혼자서 산보하듯 동네를 돌아다녔다. 서울 교대 옆 단독 주택은 티비에서나 보던 고급 주택들이 있었다. 네이버 부동산으로 검색했다. 세상에나 오십억 육십억대의 집들이다. 이생에는 갖지 못할 집이나 잊히지 않는다. 서울의 단독주택지를 검색해 일년을 돌아 다녔다. 눈에 푹푹 빠져 신발이 젖을때부터 더운 여름날을 지나 나뭇잎이 떨어질때를 지나 다음해 봄까지 찾아 다녔다. 내게 좋은 집은 내 돈에 맞는 집이다. 돈에 맞으면 거듭해서 찾아갔다. 맘에도 들고 돈에도 맞는 서초동 아파트가 있었으나 전세금이 많은게 무서웠다. 간이 작아 갭투자는 선호하지 않는다. 전세금은 팔면 해결이 되지만 그만한 배짱이 없다. 일원동을 갔다. 담임했던 아이가 삼성병원에 입원해 이 동네는 가본적이 있었다. 전세금도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고 내 돈에도 맞았다. 이 시기가 잠깐 집값이 소강 상태로 이전에 비해 약간 떨어진 상황이었다. 조금 더 떨어지기를 바라며 몇 달 망설이다 다시 찾아 갔다. 억대가 올라 있었다. 포기 했다. 네이버 매물을 매일 검색하고 논현동 아파트와 단독들을 돌았다. 논현동은 나홀로 아파트만 살 수 있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북촌과 서촌을 찾았다. 북촌은 서촌 보다 비쌌다. 전철역도 가깝고 내 돈에 맞는 서촌집을 샀다. 이 집에 또 변수가 발생한다.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던 한옥이다. 부부 공동명의로 계약을 했다. 전원 주택같아 좋았다. 계약을 마치자 갑자기 딸이 자기 명의로 바꿔 달라고 했다. 과천 집을 팔겠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에 약하다. 남편에겐 큰소리 치고 타박도 놓지만 애들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부동산에 물었다. 바꿀수는 있으나 매도자의 동의를 직접 구하라고 했다. 구구절절 편지를 써 매도자에게 드렸다. 비혼주의자 딸에게는 원하는대로 해주면 결혼을 해야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 세입자가 게스트하우스는 가을이 성수기라며 잔금일을 두달간만 늦춰 달라 했던걸 거절했었다. 명의 변경을 허락해주면 매도자가 두달 동안 받아야 할 월세는 내가 지불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라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과천 아파트는 금방 팔렸다. 부동산도 공부를 해야한다. 증여한 집은 이월과세 적용기간이 5년이다. 둘째 딸이 해외로 나가면서 부동산 상식 책을 사주고 갔다. 읽지 않았다. 다행히 예외 사항이 있었다. 팔았을 때 증여자인 부모 소유로 귀속되지 않아야 한다. 수증자 즉 딸 소유로 등기를 하고 내가 세입자로 계약서를 썼다. 나중에 알게 된 이월과세 때문에 맘을 졸였다.      

금년 부터는 10년으로 적용한다. 10년간 팔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아끼고 아껴 자식에게 집 사주는 일이 이렇게 죄지은 것 마냥 규제가 심하다는게 억울하다. 맞벌이 하느라 고생은 아이들이 많이 했다. 전업주부인 친정 올케들은 아이들 뒷바라지를 잘해 다 의사로 키웠다. 사위 며느리도 의사다. 과천 아파트는 살 때 가격보다 팔 때 가격이 배가 올라 이정도면 됐다 싶었는데 웬걸 팔고 나니 세 배가 되었다. 집도 묵히면 산삼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가슴이 쓰렸다.     

서촌 집은 오르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파트는 드러나게 폭등했다. 많이 오른 곳이 하락폭도 크고 빠르다. IMF때도 그랬고 금융 대란때도 그랬다. 집값이 오를 때는 매도자가 앓아 눕고 하락할때는 매수자가 않아 눕는다. 계약할 시점보다 잔금 치를때가 되면 집 값이 변해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파트값이 폭락한다고 카페는 폭락 글로 도배 되고 있다. 집이 오르고 떨어지는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된다. 내 집이 오르면 남의 집도 오르고 내 집이 떨어지면 다 같이 떨어진다. 맘편히 내집에서 살고 있다가 팔때 잘 팔면 된다. 부동산은 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상 비쌌다. 잠시 떨어진 적은 있지만 그래도 소득 대비 싼건 아니다. 집이 안팔린다는 지금도 비싸다. 사람들에게 내 집 마련은 일생의 과제였다.     

     

딸은 직장 근처에 집을 얻어 주었다. 결혼 하겠다는 말은 속임수였다. 딸 명의 집은 금손 남편이 정성을 다해 관리한다. 을지로에 가 사다리를 먼저 샀다. 을지로 기계 공구 상가를 자주 갔다. 가게 아주머니가 말했다.      

“여기 3년 다니면 집 한 채 짓습니다.”      

     

남편은 이제야 적성을 찾아 발휘하고 있다.      

작은 나무 사다리도 만들었다. 동네 한바퀴 돌다보면 버려진 자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오래된 동네다. 어딘가에는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집이 꼭 있다. 처음엔 아까워 자주 주워 모았다. 와인 상자를 주워다가 철물점에서 바퀴를 사 달았다. 양파 저장고로 쓴다. 화분 받침대도 만들었다. 선반도 여러곳에 만들었다. 남편은 지붕 위에 올라가 점검하고 수리도 한다. 한옥 기와지붕에서 자라는 와송도 캤다. 이웃 집을 수리할 때 새 기와도 함께 사 쟁여 놓았다. 방문도 새로 짜 맞춰 바꿨다. 시인 노천명 생가를 헐고 새로 집을 짓는 곳에서 한옥문을 만들어 달고 있었다. 청와대 한옥문 만든 목수라고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집 문을 만들어 주었다.          

서촌 한옥 작은 마당에서 나는 꽃 나무 가꾸는 재미에 빠졌고 남편은 집 가꾸는 재미에 빠졌다. 서울시 한옥 지원센터에서 보내주는 전기 업자가 와 전기 용량을 확대 해주었다. 지붕 수리도 해주었다. 최근에는 소방 시설을 설치해준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집을 쓸모 있는 집으로 업그레이드해 돌려 주어야 한다. 한옥 교실도 둘이 다니며 공부를 했다. 한옥 협동 조합에서 하는 무료 배움이다.     

한옥 신축시나 개축 시 보조금이 나온다. 이웃집은 10평대 한옥이고 개축비로 지원금 9천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지붕이 무너지고 쓰러져 가던 허름한 집은 예쁜 새 한옥이 되어 공방 전시 판매장으로 쓰고 있다. 자잘한 흰꽃이 꽃다발처럼 피어 있는 안개꽃을 심어 한옥의 정취를 아름답게 해 준다. 집 짓던 소장님에게 평당 건축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1200 만원이라고 한다. 보조금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집 평수에 따라 보조금이 다르지만 상한선은 작년에 일억 이천만원이라고 했다. 이 동네 단독은 판매 시설이나 사무실로 쓸 수 있다. 음식점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대로변이 아니어도 치과 빵집등 골목 골목 가게들이 있다. 우리 집에서 이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동네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좀 더 큰 집으로 이사 갔다. 살던 동네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집 담 옆에 심은 병꽃 나무-노지 월동 가능하고 삽수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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