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 양문을 여시오
세상에 양문형 냉장고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다. 입사 후 일 년 뒤 출시된 걸작이므로 잊을 수 없다. 양문형 냉장고는 대박을 터뜨렸다. 용산 및 강남 매장을 중심으로 주문서가 밀려들어왔고, 팩스에 종이가 없어서 주문이 들어왔는지조차 모르고 넘어간 적도 있었다.
냉장고가 만들어지는 대로 고객들에게 순차 배송되었다. 공급이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객들은 매일 언제 물건을 받을 수 있는지 매장에 전화했다. 고객별로 예상 일자를 피드백해 주는 것도 내 주된 업무가 되었다.
결혼하기 전, 부모님께 양문형 냉장고를 선물하고 싶은 고객이 있었다. 배송일자는 몇 번이나 연기되었고 매장 점장은 본사에서 고객을 설득하라고 고객 정보를 넘기기에 이르렀다. 고스란히 나는 그 고객의 클레임을 감당해야 했다. 얼마나 독에 찼을까 하는 무서운 마음으로 고객에게 전화했다.
젊은 여자 고객은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 책임지고 내일까지 냉장고를 가지고 오라' 했다.
무엇을 말하던 모든 사정과 변명은 당신 사정이고요, 내일까지 냉장고를 자기 집으로 가지고 오란다.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니, 그건 매장이 담당할 일인데, 바보 같이 네가 왜 전화를 했냐고 화살이 돌아왔다.
참~ 하~ 한숨만 가득 찼다. 해결방법이 안보였다. 냉장고 사업부장님을 만나러 가야 하나 싶기도 했다.
밤새 잠이 안 오고, 아침에 출근하는 길이 지옥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차라리 아팠으면 하는 생각을 되뇌며 출근했다.
2. 봉천동 아파트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못하고 종일 고민하던 끝에 직접 고객 집에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누군가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주소를 집어 들었다.
20년 전에는 개인정보에 규정에 대한 기준도 거의 없었고, 고객 클레임 처리라는 마음에 무작정 찾아갔다.
봉천동의 어느 아파트. 당시 구글맵도 없이 지도를 보고 대강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타고 아파트 근처까지 갔다. 작은 한라산 같은 언덕에 아파트가 꽤 많았다.
VIP 손님에게만 주는 주석잔 세트와 음료수 12개짜리 팩을 들고, 아파트를 오르기 시작했다.
땀이 차서 흐르는데, 양손의 짐 때문에 잘 딱지도 못한 채, 수십 분 정도 등산 후 그 집 초인종을 눌렀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저는 S회사에서 냉장고 때문에 왔습니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어주신 분은 고운 아주머니셨고, 내 꼬락서니를 보더니 어서 들어오라고 하셨다.
이렇게까지 오게 된 사정을 말씀드리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아가씨가 죄송할 게 뭐냐, 잘 챙겨서 배송해 줘라"
우리 딸이 화나서 그랬나 본데 착한 애라고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너무 고마워서 '엄마' 할 뻔했다.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는데 부딪혀 보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명의 고객을 지켜냈기도 했고, 앞으로 우리 제품을 좋게 생각할 것이라고 느꼈다. 이렇게 내 심장에 회사 피가 콸콸 수혈되고 있었다.
올라갈 때 못 보았던 것을, 내려갈 때 보았노라 라는 시인의 글귀가 정답이다.
귤 색으로 물든 하늘과, 구깃구깃해진 지도,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파트들이 보였다.
상쾌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마무리 보고를 했다.
3. 그러라고 회사가 널 뽑은 거야?
"고객님댁에 가서 잘 말씀드렸습니다."
'잘했다 녀석아 라고 하면 뭐라 하지?' 뒷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 하러 갔어? 고객 만나라고 회사가 널 뽑은 거야? “
어쩌고 저쩌고 뒷말은 안 들렸다. 그저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목이 콱 막혀서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퇴근했는지 모르게 집에 왔다.
너무 피곤해서 꿀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매장이 문을 열자 다시 시작되는 팩스와 전화 전쟁.
점장님이 전화를 하셨다.
"담당님! 고객님께서 좀 더 기다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히히 웃고 말았다.
왜 웃음이 안 멈추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