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사랑을 이토록 세련되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실연의 고통을 겪는 두 경찰이 사랑을 통해 각자만의 삶으로 나아가는 영화이다.
언뜻 보기엔 난해하고 인물들이 ‘왜 저러지?’ 싶은 행동들을 자주 하지만, 이는 개연성을 내어주고 연출을 가져간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663의 집에 페이가 들어가는 것 말이다.
현실을 따지면 ‘왜’를 따질 부분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지알로나 예술 영화 등에서 서사나 개연성에 대한 이유를 새새히 따질 필요 없듯 엄연히 ‘예술영화’에 속해있는 이 중경삼림도 그러한 것을 따질 필욘 없다.
오히려 중경삼림을 볼 때 집중해야 할 것은 순간순간 지나가는 화면, 즉 미장센의 디테일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대사가 재한적이고 반복적이다.
‘여자는 많지’라는 대사나 ‘통조림의 유통기한’ 등의 반복되는 키워드들이 영화의 주제부를 잡아준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통조림의 유통기한’ 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의 유통기한이다.
지무가 뱉었던 대사처럼. 그의 사랑엔 유통기한이 있었다. 5월 1일이란 날짜 말이다.
당일에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잔뜩 먹고 그 미련을 토해내던 지무의 모습은 사랑으로 인해 탈 난 모양새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탈이 난 지무는 그날 가게에서 처음 만난 여자인 노란 우비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해가 뜨면 보내줄 기약 없는 기러기 같은 사랑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야기의 663과 페이는?
둘의 사랑에도 과연 유통기한이 없을까?
663은 작 중 황어맛이 나는 연어 통조림을 먹었었다. 이는 663의 그녀에 대한 은유이자 그의 미련이라고도 해석된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떠나보내고 페이를 새로 찾았을 때, 그 둘의 사랑의 유통기한은 과연 언제까지일까.
하지만 이 영화는 한계를 정해둠으로써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다 말해주고 있다.
‘유통기한 있는 통조림 안에 든 사랑’ 일지라도 서로 사랑하겠다는 그 다짐이 둘의 관계를 더 빛나게 만든다.
‘여자는 많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 소개 해줄까?’라는 가게 사장의 대사와는 달리. 둘의 세상엔 서로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것을 매우 세련되고 멋진 연출방식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그 방식은 무엇일까?
화면엔 주로 3가지 요소가 잡힌다.
빛, 색, 물.
그리고 조도는 인물들과 상황의 감정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가령 예를 들면 노란 우비의 여인과 지무의 첫 만남과 하룻밤이라던지, 결국 그들은 떠오르는 해를 뒤로하고 이어지지 못했지만.
663과 페이가 쨍한 푸른빛 조명 아래에서 사랑을 고백한 것처럼.
빛은 곧 인물들의 앞길에 깔릴 레드카펫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물은 무슨 키워드일까.
간단하다. 작 중 등장인물들은 단 한 번도 직접 ‘우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이들이 슬플 땐 하늘에서 비가 내리거나, 물걸레로 사랑하는 이가 보이는 창가를 닦는 등의 연출을 보여준다.
즉 이 영화에서 ‘물’이란 키워드는 곧 ‘눈물’로 해석되며 이는 영화에도 직접적으로 나오는 요소이다.
‘수건이 울고 있다’ 나 ‘비 올 때 조깅을 해 온몸에 물을 뺀다’ 라든가.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은유적 방법을 택했다.
이잰 색만 남았다. 이 영화에선 색이 가장 중요하다.
화면은 화려한 한색과 난색의 대비로 인물들의 순간순간의 감정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1차원적은 아니다. 이 영화는 그 색의 연출조차 비틀어 버렸다.
슬프다고 생각한 장면은 사실 행복에 대한 미련일 수도,
행복하다 생각한 장면은 사실 눈물일지 기쁨일지 모를 감정이 담긴 물바다일지도 모르는 이중성 말이다.
또한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의 인물들의 색상이 겹치는 것도 주요 관람 포인트이다.
옐로 코트의 여인과 페이의 옷 색이 맞는다던지, 같은 선글라스를 쓴다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작 중에서 ‘여자는 실연의 아픔을 감출 때 선글라스를 쓴다’라는 대사가 있듯.
실연의 아픔을 겪은 둘은 초반부터, 혹은 아픔을 겪은 후부터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그리고 이별로 끝이 난 첫 번째 이야기에서 노란 코트의 여인은 끝내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지만.
페이는 마지막에 선글라스를 내려 눈을 보여주며 663과 눈을 마주쳤다.
또한 페이는 663의 집에 처음 갔을 때부터 노란 우비의 여인처럼 노란 옷을 입거나 그의 집을 꾸며줄 때 노란 봉투를 들고 가는 등.
직접적으로 ‘노란’ 이란 키워드가 자주 등장한다.
이 색은 그렇담 무슨 의미일까?
아까 한색과 난색의 강렬한 대비가 화면을 채우고 있고,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준다 했다.
이와 연결된 지점으로 한색, 그중에서도 붉은색은 정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붉은 넥타이를 시종일관 매며 자신의 사랑을 전시하던 지무라던가.
딱 한번, 한색으로만 뒤덮인 663이 붉은 양말을 신어 사랑을 숨기듯 행동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에서 붉은색은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란색은, 한색과 난색의 딱 중간 지점이다.
즉 미지근한 마음이자 사랑으로 가기 전 풋풋한 첫 발걸음이 될 색이란 것이다.
처음 노란색은 그저 미지근하고 고요한 색으로 등장한다.
노란 우비의 여인이 말 얼마 없이 지무를 대한 것이라던가, ‘쉬고 가자’의 말 뜻이 정말 쉬자는 의미였다던가.
하지만 페이로 넘어오며 노란색은 좀 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페이의 노란색은 자신을 버린 663에 대한 질투와 사랑으로 뒤섞인 색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노란 옷을 입은 페이가 663의 집에 침입한 것은 그저 ‘물리적 침입’ 이 아닌 ‘663이 페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허락해 주었다’라는 신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페이는 사랑과 약간의 질투를 가지고 663의 마음으로 들어가 난장을 피운 것이다.
이후 방을 꾸밀 때 옷이 푸르게 바뀌는 것도 겉보기엔 즐거워 보이지만 방을 정리하며 보이는 663의 그녀에 대한 잔재가 페이에겐 슬프게 다가왔나 보다.
그래서 흘러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고 만 것이다.
이후 정리해 둔 방에서 663은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관점의 차이’. 이것이 영화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또한 서두에서 말했던 ‘이중성’ 이 여기서 드러난다.
663은 페이가 가져다 둔 난색의 검은 줄 고양이 인형을 보며 ‘왜 이리 붉은 지’, ‘상처가 왜 있는지’ 따위를 묻곤 한다.
그러며 ‘흰색이 좋은데’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는 흰 수건을 보며 ‘특색 없게 살지 말아라’ 하고 일갈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걸리는 수건의 색도 주목할 만한 것이, 663은 분홍색에서 파란 수건이 걸리는 순간부터 페이에게 본격적으로 마음을 열었다.
더 정확히는, 둘이 마주 보고 집에 들어오라 청해 종아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리고 흰 수건이 걸릴 때 663은 그녀에 대한 실연을 겪는다.
그리고 흰 수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수건이 울고 있다’라고.
이 영화는 이렇게 나열하면 하나하나 끝도 없는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
배경의 색, 등장인물들의 옷의 색, 음악, 대사, 키워드 하나하나 모두 다.
이것은 직접 보며 해석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새련된 대사와 화면으로 20세기의 사랑을 말하는 19세기의 영화.
한 사람의 뒤로하고 떠난 하룻밤의 기억, 그리고 함께 나아가기로 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
사랑 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영화. 중경삼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