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을 우롱하는 생존본능 극복기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전쟁영화. 한 국가의 지역명을 제목으로 하여 그곳에서 일어난 일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덩케르크에는 눈에 띄는 특이점이 있다.
바로 ‘전쟁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살해, 피, 시체 등의 연출이 전무하단 것이다.
폭발로 사람이 죽어도 피 한 방울 없이 황량한 모래먼지만 휘날릴 뿐 그 뒤에 발생된 시체는 어떠한 감정적 소비도 없이 건조하게 처리된다.
사실 이 자극적인 죽음에 대한 직접적 연출은 전쟁영화의 스테레오 타입이자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덩케르크는 이 기본을 지키지 않았는데 어째서 높은 평가를 받은 걸까?
그 이유는 스테레오 타입적인 시각적 자극을 뺀 대신, 그 자리에 직관적인 심리적 연출장치를 넣었기 때문이다.
피나 시체가 빠진 전쟁은 오히려 ‘죽음’과 ‘공포’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고스란히 주인공 토미를 덮쳐온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공포적인 상황을 신파 같은 것이 아닌 담백히 묘사해 낸다. 따라서 이 연출은 두 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하나는 눈 돌릴 요소가 없으니 매인 감정선을 몰입하기 수월하단 것이며 다른 두 번째는 요소가 많지 않으니 이해가 단순하고 우리가 토미와 다른 주연인 깁슨의 관계성에 집중하기 쉽단 것이다.
토미와 깁슨은 우연히 만난 관계이지만, 서로를 끝까지 구해주며 최종목표인 생환까지 함께하는 동료이다.
둘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지만 서로를 연결하는 인간적인 연민은 그 둘을 서로 죽음에서 한 번씩 구해준다.
또한, 이 영화에선 ‘단절’이 주로 등장한다.
배가 침몰하거나, 혼자 남은 조종사, 배를 타고 생환할 거란 희망 등등
주로 이 영화는 주연 3인방을 타인, 혹은 희망과 단절시킨다. 그럼 이 단절에 대한 이유 혹은 대가가 있을탠대 그건 무엇일까?
바로 구원 혹은 구원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단절당한 토미는 깁슨에 의해 구해졌고, 영국군 소대원들에게 쫓겨날 뻔한 깁슨은 토미가 구해준다.
반대로 전투기 조종사인 파리어는 타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편대와 떨어져 죽을뻔한 주인공 일행과 사람들을 구해준다.
이 영화는 이렇듯 겉으로 보기엔 건조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실상 그 속을 파고들면 생사에 순간도 이겨내는 인간찬가를 주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포인트는 영화 내 대사로 유추할 수 있다.
Survival's not fair.
“생존은 불공평한 거야.”
No, it's shit. It's fear, and it's greed. Fate pushed through the bowels of men.
“아니, 생존은 공포이자 탐욕이고 본능을 농락하는 운명의 장난이지.”
이 대사는 깁슨이 독일군을 피해서 탄 배에 내 쫓길 위기에 그를 내쫓으려던 소대원이 한 대사이다.
소대원들이 깁스 때문에 다 죽는 것을 불만 삼아 쫒으려 하는 상황이었고 영화 내에서 갈등이 가장 고조되던 포인트 중 하나였다.
이처럼 삶을 갈구하며 타인을 버리려던 소대원들은 생존을 ‘본능을 농락하는 장난’이라 말하며 스스로의 도덕성을 놓은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이들은 침몰하는 배에 갇혀 다 죽고 말았다.
난 이 ‘공포와 탐욕, 본능을 농락하는 운명적인 장난’으로 칭해지는 생존 본능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악한 본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을 통제하고 그것을 시험하는 것이 영화가 말하는 생존 본능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주연 3인방은 끝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인간성을 농락하는 생존 본능을 이겨내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인간성은 하나의 장치로 묘사되는데, 바로 ‘물’이다.
토미와 깁슨은 함께한 뒤 큰 일을 한번 겪고 서로가 서로에게 물이 가득 찬 통조림이나, 자신의 물통을 나누는 장면이 존재했다.
이후 물은 완전한 죽음으로써 존재한다. 소대원들과 함께 침몰하던 배에 차오르던 바닷물, 고국으로 돌아가던 여객선을 어뢰가 강타해 침몰하던 배.
그 속에서 엑스트라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단 두 명, 토미와 깁슨만이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며 물이란 요소는 둘을 이어주는 다리이자 관계의 상징이 되었다.
작 초반에 토미는 독일군이 날리는 총알 세례 속에서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소대원만 잃고 대대로 돌아온다.
또한 깁슨도 원래는 살기 위해 영국군의 이름표를 떼고 있었지만, 토미와 우연히 마주치며 그 영국군을 묻어준다.
이 둘은 영화 내내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구해준 전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짜놓은 것은 ‘살아남는 것이 승리다’라는 영화의 시놉시스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구조이다.
그야 일반적으로 생자가 승리라는 논리는 강자에게 적용되니까, 작 중 내내 철저한 약자로 남아 앤딩까지 약자로 살아남아 스스로를 불신하던 토미에게는 어떻게 보면 우롱하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 ‘강자의 승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약자들의 인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철저했던 두 주연들에게 영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흔히 전쟁영화들에서 강조되는 강렬하고 감동적인 승리, 자극적인 시각적 연출을 모두 배재시킨 독특한 영화인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약자들의 인간성이 채우고 있다.
끝없이 터지는 폭탄세례와 총알세례 속에서 혼자 남아 사람들을 구하기로 한 사람, 죽음의 순간에도 서로를 구해준 사람 둘의 인간성을 찬가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토미와 깁슨은 주인공이잖아, 그 둘은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니야?’
맞다. 둘은 주인공이다.
때문에 영화 내에서 비중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둘은 ‘많은 비중’ 외엔 뭔가 특별하단 것이 없다.
캐릭터 성이 전무하단 이야기이다. 전쟁에 대해 어떤 감정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성격인지 하나 알려주는 것 없이 이 영화는 그저 둘의 목표만을 비춘다.
그것이 무조건적인 생환이다.
또한 둘은 영화 내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지도 않는다.
맨 처음 선박에 탑승할 땐 그냥 들어갈 수 없으니 의무병인척하는 꼼수를 부리고 이후엔 깁슨, 토미가 차례로 죽을 뻔한다.
그리고 둘은 생환하여 즐겁게 해어지는 앤딩이 아닌, 그저 해어지는 앤딩을 맞이한다.
이 영화에서 표현되는 이 두 주인공은 ‘캐릭터’ 로서의 기능은 전무하고, 대신 한 ‘역할’로써의 기능에 충실한다.
바로 평범한 군인이다.
의도적으로 캐릭터 성을 없애 신파를 재외 시키고 평범함을 강조시킨 이유는 이 둘은 단순히 하나의 캐릭터가 아니여서이다.
이러한 평범함으로, 이 감독은 시놉시스에서 말한 ‘우린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문장을 뒤틀어 전달하고 있다.
바로 끝까지 싸우는 것은 군인들을 구하러 오는 조국의 배들, 인간성을 가진 모든 이들의 이타심이 실체화된 적이 아닌 ‘생존 본능’이라는 적에게 저항하는 행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독일군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이다. 이 영화에서 주요한 적은 바로 생존 본능에 근거한 이기심으로 작동한다.
배를 이끌고 덩케르크로 오던 도슨은 아들의 친구인 조지를 떨고 있는 군인에 의해 잃고 만다.
떨고 있는 군인은 배를 회향하라 협박하지만 도슨은 소중한 이를 잃었음에도 회향할 수 없다 말하며 덩케르크로 향하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이 군인은 점점 자신의 인간성을 우롱하던 생존본능을 이겨낸다.
전투기를 조종하던 편대의 대장 파리어는 동료를 잃고 자신도 연료가 없어 귀환하지 못할 위기에, 귀환과 구조를 고민하다 덩케르크 해협으로 향한다.
파리어도 도슨도 적군이나 떨고 있는 군인과 싸우던 것이 아닌 생존 본능과 싸우고 있던 것이다.
때문이 이 영화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실감 나게 묘사한 전쟁영화에서 그치진 않는다 생각한다.
필수 요소를 배재시키고 대신 그곳에 인간성에 대한 시험을 인물들에게 적용시키어 그들이 ‘어떻게 인간찬가를 이루어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들을 아주 평범한 군인, 인간등으로 묘사하며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평범한 이들도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생과 사의 순간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덩케르크는 폭력적인 죽음의 이야기가 아닌 생존본능에게서 인간성을 지켜낸 영웅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