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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Sep 30. 2024

책들의 시간 104.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 창비 시선, 안희연, 황인찬 엮음_창비

  오랜만에 시집을 손에 들었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제목도 정말 좋아서, 이 구절을 읽고, 또 읽고 했더랬다.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시집을 다 읽고서야 이 구절이 이대흠 시인의 ‘목련’에 실린 한 구절인 줄 알았다.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몇몇 글자의 뒤바뀜, 그럼에도 분명히 읽히는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여러 번 되뇌어 보았다. 쓸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좋은 구절이다. 


  이 시집은 500번째 창비 시선을 맞이하여 401번부터 499번까지의 시집을 돌아보기 위해 기획된 책이라고 한다. 엮은이 역시 안희연 시인과 황인찬 시인. 최근 황인찬 시인의 시들을 몇 편 찾아 읽은 적이 있다. 낯설지 않아서인지 괜스레 궁금해졌다. 어떤 시들이 모아놓은 것인지, 그리고 왜 제목을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정했는지, 시를 다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한 어떤 시들도 있었고,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삶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의 마음을 여전히 흔들어놓는 건 ‘사랑’이기 때문에 그리 느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하여 시가 들려주는 그 낯선 목소리에 우리의 마음을 포개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새로워질 수 있고, 시는 우리와 함께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도달한 곳에서 우리는 내일로 이어지는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풍경은 다채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 엮은이의 말 중. 


   시를 다 읽고 나서, 내가 시를 좋아했던 시절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시 수업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았다. 시를 읽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나는 시를 읽으면서 꼭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 시어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시를 읽는 편이다. 그렇게 하면 내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리고 한 편의 그림이 스쳐 지나간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림이 참 많이 그려지는 시들이 많았다.    

  

1. 가난, 결국은 가난. 


기다리는 사람/최지인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띠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들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나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 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시를 소리 내어 여러 번 읽고는 끝내 참 많이 슬퍼졌다. 빛이 어둠으로 바뀌는 순간, 그 순간에 대한 묘사가 죽음처럼 다가와 더 슬펐는지도 모른다. 살아갈 의지도 잃어버린 젊은이. 미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설거지뿐인 여유 없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층에서 들려오는 새벽 세탁기 소리도 이해하는 그 마음. 심장이 조용히 뛰는 그 순간. 모든 순간이 슬펐지만,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는 ‘우리’라는 시어에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라는 구절에, 결국은 살아낼 삶이라고 한 줌 희망을 품어본다. 

     

  ‘가난’하다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나는 가난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보기에 나의 삶은 충분히 가난할 수 있으며, 여전히 내 평생의 소원이 돈을 펑펑 써보는 것이기에 나는 이미 가난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결혼 초 거짓말처럼 샴푸가 다 떨어질 때면 꼭 쌀도 다 떨어졌었다. 추석 때 집에 온 딸이 “엄마, 엄마가 외할머니댁에서 샴푸며 치약이며, 반찬이며 늘 쟁여온 이유를 알겠어.” 그리 말했다. 혼자 살다 보니 샴푸며 린스, 치약을 사야 할 때가 돌아오고 그런 돈이 제법 많이 들더라는 거였다. 사는 게 결국은 그렇게 물질적 어떤 것에 대한 충족과 갈망인지도 모른다.      


  시, ‘기다리는 사람’은 손과 발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살기를 바란 게 아니었지만 원하는 그 모습대로 살아가기엔 넉넉하지 않다. 늘 곰팡이가 떠다니는 집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줄여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간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젊은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본다면, 그래도 더 괜찮은 방향으로 삶은 진화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다리는 사람’의 그 기다림의 희망의 빛이었으면 좋겠다. 


2. 나를 돌보는 시간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손택수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생을 함께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시의 화자는 지금 아픈가 보다. 쉬지도 못하고 결국은 약국을 찾는다.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살아왔나 보다. 그때 만난 것이 ‘은목서’. 찾아보니 향기가 좋은 나무였다. 은목서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화자는 눈빛만 남은 어떤 이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넋을 놓고 나무 그늘 흔들리는 빛을 좇아가며 지금은 병가를 쓰고 있는 중이라 되새긴다. 그렇게 겨울 독감 주사를 맞고 한 해를 무사히 잘 보내듯, 화자의 시간은 또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중인가 보다. 


  시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은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아파서 쉬는 것도 내 맘과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결국은 찾게 되는 것이 산책길의 나무, 작은 꽃, 버섯, 물망을 맺힌 잎, 그런 자연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래서 화자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약국에서 약을 사 와서는 나무 의자에 앉은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시선,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은목서 나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의 결 따라 차즘차즘 잦아드는 아픔. 


  나를 돌봐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많이 한다. 쉬이 피로해지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유 없는 알레르기가 갑자기 생기기도 하고, 말할 힘이 없어지기도 한다.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게 지금 나는 필요하다. 마흔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을 주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 화자가 반성하는 삶의 모습. 쓸쓸하기만 삶.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내게도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가만히 앉아 나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3. 정리     


  시를 소리 내어 읽어 본다. 시어가, 시의 구절이 하나하나 가슴에 들어온다. 

  ‘하얗게 감자꽃 피우는 바람, 비밀처럼 간직하고 픈 생(울창하고 아름다운/리산), 저물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여행의 메모/장석남), 거기까지만 섭섭하긴 해도 거기까지만(연두/정희성), 어수선한 몽상의 이미지, 하얗게 지워지는 머릿속(이 꿈에도 달의 뒷면 같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까/최지은), 오래 만진 슬픔(이문재), 가끔씩 나는 나의 고도가 헷갈리고(중심 잡기/조온윤)’ 

  시의 구절 하나하나가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며, 누군가가 그리워지게 만들었고, 많이 사랑하는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시가 참 좋아진 시간이었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시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스스로를 돌보아야겠단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이며, 지금 어떻게 스스로를 돌보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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