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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Sep 04. 2023

15 그해, 여름 손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군대 속 커밍아웃 05


15 그해, 여름 손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한국어판 소설 제목은 <그해, 여름 손님>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줄여서 콜바넴이 게이 영화의 바이블로 자리 잡혀 가는 시기. 소설도 큰 주목을 받았다. 


독자들은 내용과 별개로 번역 제목이 별로라는 혹평을 했다.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라는 주인공의 사색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여름 손님’이라는 다소 진부한 말로 불리는 걸 아쉬워했다.


번역에 대해 팬들이 어느 포인트에서 아쉬움을 느끼는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해, 여름 손님>이라는 제목이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다. 청년 게이의 사랑이 분기 정도의 기간과 섭씨 33도 정도의 여름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점이 내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름 손님이라는 표현을 알기 전) 내게 한국 게이의 사랑은 번개와 같았다. 이건 개인적인 비유가 아니라 일종의 빅데이터 결과에 가까웠다.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말이 번개 구한다는 문구인데, 이는 하루 섹스할 상대를 구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번개라는 말이 게이 업계에서의 은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몇 해 전, 강릉에 놀러 간 김에 그곳에 살고 있는 잘생긴 군대 후임에게 연락을 했던 적이 있다. 가벼운 안부차원에서 인사했는데, 그 친구는 답으로.


- 번개 고고?


라고 답장이 왔었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고,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 군대 후임과 섹스를 해도 되는 것인지. 다른 군대 지인들이 이번 번개로 인해 멀어지는 게 아닐지와 같은 고민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용기를 내어서.


- 콘돔은 네가 준비해.


라고 타자를 치던 도중. 답장이 왔다.


- 트리인더하우스 브런치 카페가 있는데. 여기로 지금 오세요. 제가 일하는 곳인데, 곧 끝나서 같이 밥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무슨 의미일까 하고 일단 약속 장소로 가서 후임을 만났다. 그리고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 번개 하자는 말. 사실이야?


- 네? 그럼 사실이죠. 그래서 형 온 부른 거잖아요. 밥도 먹고 있고.


- 다행이다. 그럼 장소는 있어?


- 네? 뭔 장소요? 저 형이랑 밥 먹고 뒤에 여자친구 만나야 하는데요?


- 그럼 번개 하자는 말이 뭔 뜻이야?


- 이렇게 갑자기 약속 잡아서 재빨리 빈 시간에 커피 마시고, 밥 먹는 거죠? 아니에요?


- 아…. 그렇지? 게이들 사이에서는 번개 하자는 게 섹스하자는 거거든.


- 형. 저 이성애자예요.


- 응. 밥이나 먹자.


번개가 게이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게이의 사랑에도 낭만을 쫓으려 했던 내가 평범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게이의 사랑을 ‘번개’라고 표현되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고, 육체적인 사랑을 쫓는 이들에 토를 달지 않게 되었다.



섭씨 28,000도의 뜨겁고도 강렬한 사랑. 그마저도 데이팅 어플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불가능했는데, 이제는 섹스 상대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대에 살고 있으니. 게이의 사랑이 번개라고 취급하는 것쯤은 어쩌면 당연했고, 한편으로 감사한 것이었다.




그런 시기 즈음. <그해, 여름 손님>을 읽게 되었다. 책에서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은 여름의 6주간 짧은 사랑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연출되지 않았지만) 먼 미래에 두 인물은 재회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시간은 그 여름에 머무르고 있었다 말한다. (이런 장면 덕에 책 제목에 여름 손님이 들어가지 않았나 추측한다.)


책을 덮고. 한참 동안 표지를 바라보았다.


- 6주간의 사랑. 짧은 건가?   


비록 여름 같은 사랑이 번개의 온도에 비해 뜨뜻미지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초속 100,000킬로미터의 한국 게이 커뮤니티 속 삶에 비해 너무나 길고, 거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의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 우리의 사랑도. 번개가 아니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름 손님 만치만 되었으면.





에필로그. 데이팅 어플을 하다 보면 사랑에도 유행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 영화가 처음 나왔을 17년도 시기즈음에는 번개 같은 사랑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요즘 어플 이용자들은 그것보다는 긴 FWB라는 관계를 선호하고 있다. 사랑의 유행이 번개에서 FWB로 바뀌었달까?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는 6주 정도의 사랑이면 만족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상황에 놓이니까 더 길었으면 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랑하는 게이 분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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