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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Nov 02. 2023

17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

이제는 조금 덤덤해진 사회인의 커밍아웃 02


17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법


사계절의 변화에 기분 좋은 감상에 젖었던 적이 없다. 계절이 달라짐에 따라 덥고 춥고의 기온 차이만 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여름은 더워서 싫었고, 겨울은 추워서 싫었다. 봄이 되면 약간의 건조함이 기분 좋게 하기도 했지만, 기어코 찾아오는 꽃샘추위는 대놓고 추운 겨울보다 괘씸했다.


가을의 시작점인 추석이 되어 시골을 내려갈 때면, 동승한 어른 누군가는 꼭 들판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을 보며 웃었다. 그 어른은 엄마가 되기도, 아빠가 되기도, 할머니가 되기도, 할아버지가 되기도, 고모가 되기도, 이모가 되기도 했다. 그 어른 누군가는 꽃의 잎이 아직도 초록색이라 좋다 했고, 누군가는 노란색이라 좋다 했고, 누군가는 빨간색이라 좋다 했다. 추석을 경험한 햇수가 늘수록 내 마음속 가을의 꽃은 이 색 저 색 섞이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서 뒤엉켰다.


머릿속에서 뒤엉켜 있던 계절에 대한 색깔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초록색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다. 예전에는 온도에 따라 피부에 닿는 촉각으로 계절을 이해했다면, 초록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그 양상이 바뀌었다. 계절을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계절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초록색이 풍성하다는 이유만으로 여름이란 계절을 좋아하기로 했다. 7월에 길가의 모든 잎은 종과는 상관없이 모두 초록색이었다. 또 장마 비가 내리고 나면 주변의 초록잎들은 공기마저 생그러운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온통 초록색인 여름은 더워도 괜찮았다. 초록색이 많으니 괜찮았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초록 잎들은 어느새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으로 변해있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초록잎들이 노란색과 빨간색으로 물들여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 나는 더 이상 초록색이 아닌 나뭇잎을 좋아해서는 안될까?


당연하게도 그럴 이유는 없었다.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한 색깔들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초록색이 지나가 남아 있는 노란색과 빨간색을 좋아하기로 했다. 덤으로 가을을 좋아하기로 했다.


초록색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은 그 해에도 예년과 같이 추석은 찾아왔다. 시골을 내려가는 길에 승용차 창문을 모니터 삼아 바깥을 구경했다. 그곳에는 이름 모를 꽃이 있었고,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사이드 미러에 비친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겨울은 가을과 닮아 있어서 좋아졌다. 봄은 다시 또 여름과 닮아 있어서 좋아졌다. 초록색을 좋아했던 것뿐이지만, 초록은 내게 모든 계절의 기분 좋은 감상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때면 초록색을 통해 온계절을 사랑했던 때를 떠올린다. 싫었던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전복된 배를 뒤집는 것처럼 단박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좋아하는 작은 요소가 물꼬가 되어 점진적으로 전체를 사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올해 퀴어 문화 축제에서도 옆에서는 반대 시위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커다란 무대 장치에 전통 풍물 악기를 사용하여 나답게 살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들과 나 사이를 이어 줄 또 다른 초록색은 무엇이 되어줄까. 크리스마스 때면 가족과 함께 가는 교회일까. 아니면 대학 시절 풍물 동아리에서 배운 북 치는 법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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