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BE Nov 06. 2023

19 세상은 바뀐 걸까? 그대로인 걸까?

이제는 조금 덤덤해진 사회인의 커밍아웃 04


19 세상은 바뀐 걸까? 그대로인 걸까?


- 내가 피아노 반주하는데, 첼로 솔로로 연주하는 여자애가 글쎄 나보고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 뭐라고 말했는데?


- 다음 술자리에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데리고 와달란다. 그게 내 주변에 있겠니?



-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그거 되게 독특하네. 근데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어. 너네들 주변에는 있어?


남원이 형과 이야기를 하던 S 씨는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변에 이성애자 남자가 있냐고 물었다. (더 정확하게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냐고 물었다.)


- 난 없어.


- 나도 없어.


- 그러고 보니, 나도 없네.


중학생 때 어느 퀴어 영화를 한 편 본 적이 있다. 게이인 주인공이 이성애자 틈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벼락으로 인해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가 되는 내용이었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가 벼락을 맞을 확률이 높으면 높았지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로 가득 차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그 술자리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은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두에게 핸드폰을 꺼내보라고 지시했다.


- 잠깐만요. 모두 핸드폰을 꺼내봐요.


- 핸드폰은 왜?


- 혹시 최근에 회사나 일적인 대화를 제외하고, 일반(이성애자)이랑 카톡 한 적이 있는 사람 있어요?


- 음. 잠깐만. 찾아볼게.


나는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최근에 연락을 주고받은 이성애자들이 있냐고 물었다. 업무적이나 가족의 경우는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동성애자들하고만 대화를 했다고 했다.


- 형들. 누나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예전에 저는 주변에 게이 친구 1명만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정도로 주변에 게이들이 없었거든요. 레즈나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고요.


- 그래서?


- 그래서라뇨. 그만큼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이상하다고요.


- 얘, 나는 첼로 연주한 그 여자애가 여자면서 여자 좋아하는 남자 소개해달라는 게 더 이상하다. 여자 좋아하는 남자라니. 꺄르륵


- 맞아. 요즘 여자 좋아하는 남자 본 적이 없다. 얘.


남원이 형은 테이블 내 개그케답게 나의 말을 받아쳤고, 주변은 웃음으로 번졌다.


나는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 세상은 바뀐 걸까?




며칠이 지나고 퇴근 후, 회사 앞에 있는 게이 술집에서 한 잔 마셨다. 회사는 을지로였고, 건물 꼭대기에서는 종로의 거의 모든 게이 술집들을 조망할 수 있었다.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연봉이나 근무 성취와는 별개로 종로와 가깝다는 이유로 높았다.


같이 술을 마신 형들을 양 옆에 끼고 비틀대며 길거리를 걸었다. 트위터나 시티 게시판에서만 보던 힙한 가게 간판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고, 나는 만취자답게 이곳저곳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술을 더 마시자며 고레고레 소리를 질렀다.


- 저기 내가 꺽.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꺽. 유명한 곳이잖아. 꺽. 우리도 가야 하지 않겠어?


- 너 많이 취했으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너 막차도 곧 끊긴다며.


- 그놈의 막차. 막차. 막차!!! 나 이제 막차 안타도 돼. 꺽. 돈 버니까. 직장 다니니까. 꺽. 그래 저기. 저기 모텔 보이네. 저기 숙박료 정도는 월급으로 낼 수 있다고!


- 그건…. 야, 근데 저분이 너 부르는 거 같은데?


형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주변이 술에 취해 온통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 정지되어 명확하게 보였다. 그건 바로 회사 동기였다. 얼핏 단톡방에서 회사 동기 몇 명이 술을 마신다고 한 것을 보았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해받지 않기 위해 형들을 얼른 내치고, 꼬인 혀를 입을 부르르 풀며 반가운 척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형들에게는 잠깐 인사하고 오겠다 말하며 동기를 향해 뛰어갔다.


-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종로는 왠일이야?


- 오빠, 종로는 왠일이냐니, 우리 회사 앞이 종로니까 여기서 술 마시러 왔지. 오빠도 술 마시러 온 거야?


회사가 종로와 가까운 것이 마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내 게이 라이프를 회사 사람들한테 쉽게 들킬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오고 가며 게이 지인은 물론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 오빠, 오빠. 근데 여기 게이들이 많대.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서 동기 여자애는 어디 커뮤니티에서 본 이야기를 나한테 비밀 이야기 하듯 하기 시작했다.


- 오빠, 여기 뭔가 이상한 냄새나는 거 같지 않아? 바로 여기 모텔에서 남자들끼리 뒤로 섹스해서 냄새나는 거래. 에이즈도 다 옮기고. 어휴, 게이들은 다 사라져야 해 정말.


동기는 한 모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막차가 끊기면 가겠다고 형들한테 징징거리며 말한 모텔이었다. 동기는 내가 가려한 모텔을 두고 있어서는 안 될 곳처럼 묘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술이 확 깨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 근데, 오빠도 좀 수상해. 여기서 저 남자들이랑 있고. 혹시 게이 아니야?


동기의 말이 장난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표정이 굳고 어벙벙해하며 당황하자, 분위기를 전화하려고 혼잣말을 이어갔다.


- 아! 근데 오빠 여자 친구 얼마 전까지 있었댔지! 그리고 지금 동욱 오빠네도 남자들끼리서 종로에서 술 마시는 거 생각하면. 그 오빠들도 게이로 오해받겠다. 크크. 하여튼 나 막차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 오빠도 재밌게 놀아.


대화가 끝나자 힘이 풀렸다. 술과 흥이 다 깨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 세상은 그대로인 걸까?


이전 09화 18 취업 성공과 30원 그리고 축의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