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 덤덤해진 사회인의 커밍아웃 04
19 세상은 바뀐 걸까? 그대로인 걸까?
- 내가 피아노 반주하는데, 첼로 솔로로 연주하는 여자애가 글쎄 나보고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 뭐라고 말했는데?
- 다음 술자리에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데리고 와달란다. 그게 내 주변에 있겠니?
-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그거 되게 독특하네. 근데 내 주변에 한 명도 없어. 너네들 주변에는 있어?
남원이 형과 이야기를 하던 S 씨는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변에 이성애자 남자가 있냐고 물었다. (더 정확하게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냐고 물었다.)
- 난 없어.
- 나도 없어.
- 그러고 보니, 나도 없네.
중학생 때 어느 퀴어 영화를 한 편 본 적이 있다. 게이인 주인공이 이성애자 틈에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비가 많이 오는 어느 날, 벼락으로 인해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가 되는 내용이었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내가 벼락을 맞을 확률이 높으면 높았지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로 가득 차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그 술자리 주변 모두가 동성애자였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더 낮은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두에게 핸드폰을 꺼내보라고 지시했다.
- 잠깐만요. 모두 핸드폰을 꺼내봐요.
- 핸드폰은 왜?
- 혹시 최근에 회사나 일적인 대화를 제외하고, 일반(이성애자)이랑 카톡 한 적이 있는 사람 있어요?
- 음. 잠깐만. 찾아볼게.
나는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최근에 연락을 주고받은 이성애자들이 있냐고 물었다. 업무적이나 가족의 경우는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동성애자들하고만 대화를 했다고 했다.
- 형들. 누나들.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예전에 저는 주변에 게이 친구 1명만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정도로 주변에 게이들이 없었거든요. 레즈나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고요.
- 그래서?
- 그래서라뇨. 그만큼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이상하다고요.
- 얘, 나는 첼로 연주한 그 여자애가 여자면서 여자 좋아하는 남자 소개해달라는 게 더 이상하다. 여자 좋아하는 남자라니. 꺄르륵
- 맞아. 요즘 여자 좋아하는 남자 본 적이 없다. 얘.
남원이 형은 테이블 내 개그케답게 나의 말을 받아쳤고, 주변은 웃음으로 번졌다.
나는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 세상은 바뀐 걸까?
며칠이 지나고 퇴근 후, 회사 앞에 있는 게이 술집에서 한 잔 마셨다. 회사는 을지로였고, 건물 꼭대기에서는 종로의 거의 모든 게이 술집들을 조망할 수 있었다.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연봉이나 근무 성취와는 별개로 종로와 가깝다는 이유로 높았다.
같이 술을 마신 형들을 양 옆에 끼고 비틀대며 길거리를 걸었다. 트위터나 시티 게시판에서만 보던 힙한 가게 간판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고, 나는 만취자답게 이곳저곳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술을 더 마시자며 고레고레 소리를 질렀다.
- 저기 내가 꺽. 얼마 전에 트위터에서. 꺽. 유명한 곳이잖아. 꺽. 우리도 가야 하지 않겠어?
- 너 많이 취했으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너 막차도 곧 끊긴다며.
- 그놈의 막차. 막차. 막차!!! 나 이제 막차 안타도 돼. 꺽. 돈 버니까. 직장 다니니까. 꺽. 그래 저기. 저기 모텔 보이네. 저기 숙박료 정도는 월급으로 낼 수 있다고!
- 그건…. 야, 근데 저분이 너 부르는 거 같은데?
형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니, 주변이 술에 취해 온통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 정지되어 명확하게 보였다. 그건 바로 회사 동기였다. 얼핏 단톡방에서 회사 동기 몇 명이 술을 마신다고 한 것을 보았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해받지 않기 위해 형들을 얼른 내치고, 꼬인 혀를 입을 부르르 풀며 반가운 척 팔을 휘저었다. 그리고 형들에게는 잠깐 인사하고 오겠다 말하며 동기를 향해 뛰어갔다.
-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종로는 왠일이야?
- 오빠, 종로는 왠일이냐니, 우리 회사 앞이 종로니까 여기서 술 마시러 왔지. 오빠도 술 마시러 온 거야?
회사가 종로와 가까운 것이 마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내 게이 라이프를 회사 사람들한테 쉽게 들킬 수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오고 가며 게이 지인은 물론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 오빠, 오빠. 근데 여기 게이들이 많대.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서 동기 여자애는 어디 커뮤니티에서 본 이야기를 나한테 비밀 이야기 하듯 하기 시작했다.
- 오빠, 여기 뭔가 이상한 냄새나는 거 같지 않아? 바로 여기 모텔에서 남자들끼리 뒤로 섹스해서 냄새나는 거래. 에이즈도 다 옮기고. 어휴, 게이들은 다 사라져야 해 정말.
동기는 한 모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막차가 끊기면 가겠다고 형들한테 징징거리며 말한 모텔이었다. 동기는 내가 가려한 모텔을 두고 있어서는 안 될 곳처럼 묘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술이 확 깨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 근데, 오빠도 좀 수상해. 여기서 저 남자들이랑 있고. 혹시 게이 아니야?
동기의 말이 장난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계속 표정이 굳고 어벙벙해하며 당황하자, 분위기를 전화하려고 혼잣말을 이어갔다.
- 아! 근데 오빠 여자 친구 얼마 전까지 있었댔지! 그리고 지금 동욱 오빠네도 남자들끼리서 종로에서 술 마시는 거 생각하면. 그 오빠들도 게이로 오해받겠다. 크크. 하여튼 나 막차가 있어서 먼저 가볼게. 오빠도 재밌게 놀아.
대화가 끝나자 힘이 풀렸다. 술과 흥이 다 깨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 세상은 그대로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