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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Nov 13. 2023

20 유튜브는 당신의 거울

이제는 조금 덤덤해진 사회인의 커밍아웃 05


20 유튜브는 당신의 거울


- 은근슬쩍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회사 교육 일정이 끝나는 날, 같이 연수를 들은 직원들끼리 마지막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웬만하면 술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파견직이었던 R 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같은 테이블 사람들에게 게임 하나 하자고 제안을 했다.


- 분위기가 살짝 처지는 것 같은데 게임 하나 하는 거 어때요?


- 뭔데요?


- 영화 <완벽한 타인> 보신 분 계신가요?


- 아마 여기 있는 분들 다 봤을걸요? 유명한 영화잖아요. 지인들끼리 식사를 하다가 전화가 오면 스피커폰으로 다 공유하는 내용이었죠, 아마? 저희도 그렇게 해보자고요?


- 술자리가 마무리되는 것 같아서 <완벽한 타인>처럼은 할 시간은 없을 거 같고, 전화나 메시지가 오는 사람이 자신의 유튜브 어플을 켜서 ‘최근에 본 영상’ 목록을 보여주는 거예요.


내 제안에 표정을 살피니 각기 반응이 달랐다. 몇몇은 당장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반면, 누군가는 들키면 안 되는 걸 사수하려는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 그래요. 함 해봐요. 다들 술도 알딸딸하게 마셔서 다음 날 기억도 못할 거예요. 그리고 술자리 얘기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 잊어야 하시는 거 아시죠? 우리 여기서 본 내용들은 다른 데에서 말하면 안 돼요. 그럼 시작할까요?


연수 때에도 분위기를 이끌었던 오사원이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처음으로 걸린 사람은 11살 자녀를 둔 워킹맘 최 과장이었다. 아들이 수학 학원을 몰래 빠져서 선생님한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하이톤으로 ‘예, 선생님’이라고 말하며 잠시 화장실에서 통화 좀 하고 오겠다고 손짓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로 돌아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 우리 애가 또 수학학원에 빠졌다네. 얘 어쩌면 좋니. 그나저나 벌칙이 뭐랬지?


- 아이, 과장님도 참. 유튜브 어플 켜서 최근에 본 게 무슨 영상인지 보여주는 거라니까요?


- 근데 요즘 애들은 그게 궁금해? 나 별 거 없어. 요즘 임영웅이에 빠져서 미스터트롯 영상만 본 게 전부야. 자 봐봐.


나는 최 과장의 핸드폰을 술 상 가운데에 놓고, 유튜브 어플을 찾았다. 결과는 시시했다. 정말로 미스터트롯 영상만 있었다.


- 이거 정말 재밌는 거 맞아? 다들 유튜브로 보는 게 그게 그거지. 다른 게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내 제안에 묵음으로 싫은 티를 냈던 김대리가 말했다.


- 김 선배. 혹시 유튜브에서 이상한 거 봐서 찔리시는 거 아니에요? 선배 그런 반응하시니까 더 하고 싶은데요?


- 에이, 그런 거 아니거든. 오사원이야 말로 이상한 거 본 거 아니야?


- 음. 이상한 거 본 거 어떻게 알았어요? 궁금하죠? 궁금하죠? 근데 어쩌나 저는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솔로기 때문이죠. 어? 선배, 누가 연락 온 거 같은데요? 정 과장님 아니에요?


오사원이 김대리를 도발하는 도중에 김대리의 핸드폰에 정 과장 이름이 뜨고 있었다. 김대리는 나가서 받는 대신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했다.


- 김대리, 술자리는 재밌나?


- 네, 저희 이제 조금만 마시다가 가려고요. 정 과장님 근데 저희 옆 테이블에 있으시지 않았어요?


- 어어. 그렇지. 근데 아까 최 과장이랑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는데, 김대리한테 전화 한 번 하라던 걸? 재밌는 일이 생길 거라면서.


김대리는 키득거리는 최 과장을 장난 섞인 눈빛으로 째려보았다. 오사원과 R 씨와 나는 톰과 제리가 싸우는 걸 구경하듯 최 과장과 김대리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 아, 최 과장님. 이거는 반칙 아니냐고요. 대신 전화해 달라고 하는 게 어디 있어요.


- 어머머. 자기 유튜브로 보는 게 그게 그거라고 할 때는 언제고 오버는 오버야? 나도  보여줬으니까, 빨리 자기도 보여줘 봐. 요즘 젊은 애들이 뭐 보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 이거는 무효예요. 아무튼 무효예요.


최 과장은 김대리가 말을 하는 와중에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FACE ID를 풀기 위해 김대리의 얼굴에 핸드폰을 마구 갖다 댔다. 김대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락이 풀리지 않게 발버둥 쳤다.


- 아! 안돼!


김대리의 짧은 아우성과 함께 잠금이 풀렸다. 처음 보이는 핸드폰 화면에는 몇 해 전 자주 보았던 어플이 켜져 있었다. 익숙하기는 했지만 어떤 서비스였는지 까먹고 있었는데, ‘채용공고’라는 UI 문구를 보고 입사 전 자기소개서 때문에 썼던 어플이라는 게 기억났다.


- 김선배! 이직 준비하는 거예요?


- 아, 아니야. 정말로


-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이거 이직할 때 쓰는 어플인데.


오사원은 이를 놓칠세라 김대리한테 물었다. 연배가 있는 최 과장은 어플은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직이라는 단어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김대리를 다그쳤다.


- 김대리 이직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어머머머 저번 회식 때는  임금 피크 이후에도 같이 다니자고 하더니. 그거 순 술 취해서 한 말이었구나?


- 에잇. 아니에요. 그런 거.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할게요.


- 그래 말해 봐 봐. 우리 술자리에서 나눈 얘기는 다 비밀로 해주기로 했잖아.


김대리는 최 과장이 쥐고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뺏으며 이직 어플을 끄고, 능숙하게 유튜브 어플을 찾았다. 말대신 유튜브 채널을 보여주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 제가 최근에 본 영상은 다 이직 관련된 영상들 뿐이에요. 자 봐봐요. 요즘 탕후루가 대세라길래 탕후루 창업 영상을 찾아보기는 했는데, 그건 몇 개 없어요. 괜히 이직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소문나서 회사에서 찍히게 될까 봐 안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 자기가 탕후루 창업이라니. 그건 진짜 아니다. 호호. 요즘 힘든 일 있었어? 난 자기가 회사랑 잘 맞는 줄 알았는데.


최 과장은 머쓱해하며 말했다.


- 그건 아니고요. 원래부터 테크 분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처음부터 저희 회사 올 생각은 없었어요. 인사직은 적성에도 안 맞았고요. 근데 1,2년 다니다 보니까 할 만했고, 지금까지 남아있게 됐네요. 에이, 다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근데 최근 전자기기 기업들에서 채용 모집이 올라왔더라고요. 그래서 몇 개 써볼까 하고 있었죠.


평소 까불거리는 캐릭터였던 김대리가 꽤나 진지한 태도로 말을 하는 탓에 조금 낯설었다. 웅성거리는 고깃집에서 순간 우리 테이블 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갑자기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옆에 있던 오사원은 술기운에 흐려진 눈을 또렷이 하며 몰입하고 있던 것을 보면 나랑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거 같다. 그때 오사원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요? 회사에서 회사 이직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제 선배가 회사에서 이직 얘기 하는 거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가르쳐주셨거든요.


- 어머, 그게 누군데?


최 과장이 궁금해했다.


- 누구긴 누구예요. 여기 앞에 있는 김선배죠. 제가 선배라고 부를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크크.


멋쩍어진 김대리만 제외하고 테이블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 아, 근데 우리 선배 지킬 사람은 저 밖에 없는 거 같네요. 저는 연락 올 사람이 없어서 유튜브 어플을 공개할 일도 없었지만, 제 것도 공개하겠습니다. 죽을 거면 같이 죽어야죠. 다른 분들도 의리 있으면 같이 보여주기예요! 이건 필수는 아니고, 선.택.사. 항. 입니다.


오사원은 핸드폰을 꺼내 유튜브 시청 기록을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온통 필라테스 관련된 영상뿐이었다. 다만 내가 예상했던 것과 키워드가 달랐다.


- 사원님, 필라테스 학원 차릴 거였어요? 검색하신 내용들이 대부분 필라테스하는 방법이 아니라 창업이나 강사 되는 법인 거 같아서요.


-  00 주임님은 역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 예전부터 취미가 운동이기는 했어요. 그거 좀 발전시켜보려고요. 요즘 평생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요즘 새벽 5시에 직장인 강사 과정 밟고 있답니다. 짜잔. 근데 이제 00 주임님도 밝히셔야죠?


오사원은 자기 차례를 후딱 끝내고 가를 주목했다. 나는 최근 디지털 디톡스니 뭐니 해서 유튜브 어플을 지운 상태였다. 가끔 검색 엔진으로 들어가서 본 영상도 엑셀 사용법 따위밖에 없었다. 만약 한 달 전쯤 공개했더라면 게이 관련 키워드로 불안해했겠지만, 오늘의 나는 떳떳했다.


- 저 요즘 유튜브 안 보고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인스타그램도 지웠고 말이에요. 요즘엔 말이에요. 현대인들이 유튜브니 인스타그램이니 숏폼 콘텐츠들만 소비….


- 아 됐고, 저희도 다 보여드렸잖아요. 사파리에서 검색한 거라도 보여 줘 봐요.


- 알았어. 알았어. 근데 나 진짜 별 거 없어. 자봐 봐. 요즘에 본 거라고는 김사장이 데이터 주고 분석하라 해서 Vlookup 사용법 검색해 본 게 전부라니까.


다들 내 핸드폰에 보며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했다. 하지만 시시하게도 정말 엑셀 사용법 밖에 없었다.


테이블에 앉은 5명. 최 과장. 김대리, 나, 오사원, R 씨. 내 차례가 끝나니, 마지막 차례인 R 씨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R 씨는 마지막에 공개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팀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면 시키는 말은 곧잘 하고는 했지만,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 그였기 때문에 선뜻 핸드폰을 뺏어 장난칠 수도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김 대리가 입을 뗐다.


- 내가 총대 메고 선심 쓴다. 요즘 회사에서 키보드 소리가 아주 타다닥 시끄럽게 나고 있는 거 보면, 메신저를 열심히 하는 거 같단 말이야? 사내 연애하고 있으면 그거 공개해. 어차피 파견도 오늘부로 마지막인 데, 내가 확실히 밀어줄게.


- 제, 제가 뭔 연애예요. 회사 왔다 갔다 하기도 바쁜데.


- 그럼 좋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직원은 있지?


- 회, 회사에 그런 분이 어디 있어요.


R 씨는 얼굴에 핸드폰을 바싹 갖다 대고, 김대리의 말에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무언가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다들 시청 목록을 지우는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이기는 했지만, 못 본 척 연기를 했다.


- 자, 자봐요. 제 유튜브 재생목록.


그가 보여준 시청 목록에는 온통 브이로그 영상 밖에 없었다.


- 제가 브이로그 자주 보거든요, 근데 제 나이대 남자가 남들 브이로그 보는 게 흔치 않아서 말하기가 참 부끄럽더라고요.


- 그게 뭐가 부끄러워 자기, 요즘 다 그런 거 본다고 하더라.


- 맞아요. 저도 브이로그 보면서 옷 사거나 선물 줄 때 참고해요. 근데 어떤 영상 주로 보시는 거지? 한 번 스크롤 좀 내려봐요.


최 과장과 오사원이 R 씨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오사원은 슬쩍 핸드폰을 가져가 스크롤을 내렸다. R 씨를 둘러싸고 테이블에서는 여러 질문이 오가고 있었지만, 내 눈은 내려가는 스크롤에 머물러있었다. 오사원이 검지로 휘리릭 넘기는 탓에 섬네일이 잔상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그때 포착된 것이 하나 있었다.


- 게이 커플의 바람직한 상견례 브이로그


오사원과 나는 두 눈이 커진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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