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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우 Jun 24. 2023

나의 해바라기 ⑥

꿈의 학교 하랑 EP 5

그러나 그곳에는 더 이상 소녀가 알던 해바라기소녀는 없었습니다. 


원망, 슬픔, 아쉬움, 질투, 부담...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아왔던, 익숙한 그늘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텅 비고 공허한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와 소녀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습니다. 원망, 슬픔, 아쉬움, 질투, 부담……그리고 진한 체념이 눈동자라는 그릇속에서 찰랑거리며 흘러넘칩니다.  



“제 1등이라는 재능이, 그녀의 세상을 부숴버렸어요. 제 가장 친했던 친구의 세상을….”

소녀의 꼭 쥔 손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집니다. 



“대화로 풀어볼 생각은 안 했나?”

숀의 조언에도 소녀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볼을 훔쳤습니다. 잠깐동안 스쳤던 빛은 어느새 새벽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소녀의 눈동자에도 공허함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도망쳤어요. 전 겁쟁이거든요.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해바라기 소녀에게 도망치고 벌써 몇 년이 지났네요. 그녀가 그리워요. 그렇지만 저에게 더 이상 그녀와 만날 기회도 자격도 없겠죠.”



"..."



가만히 자책을 계속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숀은 한동안 고민을 하더니, 이윽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레 요란하게 기지개를 켜는 숀을 보며 소녀의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한참 동안 몸 여기저기를 시원하게 구부리던 숀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 손짓하였습니다. 



“자, 이야기 들어준 값을 해야지. 순찰 말동무를 해주게나.”



“네..? 지금?”



우울하고 불안할 때는 걷는 게 최고거든. 자리에 앉아있어 봤자 뭐 하나! 어서!”



울다가 조금은 어이가 없듯 작게 웃음 짓던 소녀는 못 이기는 척 숀의 뒤를 따라 새벽의 순찰을 돌기 위해 학교를 향해 종종걸음을 옮겼습니다. 터벅터벅 넓은 보폭으로 숀이 한걸음 걸을 때마다 소녀가 그 뒤를 두세 걸음으로 뒤쫓습니다. 고요한 새벽의 학교복도를 두 개의 각기 다른 발소리가 화음을 내며 채워나갑니다. 말없이 걷던 숀이 멈춰 선 곳은 소녀도 잘 알던 장소였습니다. 



“여긴…”

소녀의 호흡이 가빠집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른 듯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술실 문을 열었습니다. 



어둠과 먼지로 가득한 미술실을 숀은 서슴없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두껍게 쳐져 있던 커튼을 한쪽으로 밀어젖혔습니다. 새벽녘의 고요한 달빛이 창밖을 통해 들어오며 미술실을 밝힙니다. 



이제는 말이야. 도망칠 때가 아니야. 마주 볼 때지.

달빛을 머금은 창문을 뒤로한 숀의 눈동자가 고요히 떨고 있는 소녀를 쳐다봅니다. 날지 못하는 아기새를 높은 나뭇가지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며 기다리는 어미새처럼 숀은 아무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채 소녀를 기다렸습니다. 



“무서워요. 전 여기… 들어올 자격도…”

소녀의 떨림이 목소리에까지 전염되어 두려움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러나 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지금 이 장소야말로 이 소녀를 그곳에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기에. 그리고 이 기회는 그 누구의 손도 아닌 소녀의 손으로 직접 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의 기묘한 대치상황이 이어지고 이윽고, 소녀의 발걸음이 느리지만 확실히 미술실 문을 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가녀리게 얇은 그녀의 다리는 쉼 없이 떨렸지만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미술실문을 넘어 숀이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이 그림. 기억나나?”

자신의 앞에 멈춰 선 소녀를 보던 숀은 미술실 뒤편에 걸려 있는 그림을 향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고요하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를 휘감으며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그림 끝을 간질입니다. 


그것은 '새 출발' 이자, 개화



새.. 출발..



그림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이 끊임없이 떨려옵니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 끝이 그림표면의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낍니다. 어느 화가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려하고 강인한 곡선이 그림 끝에서부터 손가락을 타고 그대로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더욱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서려던 소녀의 어깨를 숀은 뒤에서 꼭 붙잡았습니다. 도망치지 말라는 듯 강인하게.



“나는 자네가 마주 볼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숀의 목소리는 아까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장난을 칠 때와는 달리 사뭇 진지했습니다. 



“새벽은 모두가 꿈을 꾸고 있는 시간이지. 그렇기에 꿈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일도 용기를 내어 이룰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말 그대로 꿈같은 일이기에 불가능한 용기를 내어보는 거지.”



“해바라기 소녀를 다시 만나보고 싶지 않은가.”

 숀의 마지막말을 듣는 순간 소녀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 7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글 다시 보기*


나의 해바라기 ① (brunch.co.kr)


나의 해바라기 ② (brunch.co.kr)


나의 해바라기 ③ (brunch.co.kr)


나의 해바라기 ④ (brunch.co.kr)


나의 해바라기 ⑤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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