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육교 위의 모순, 누가 진짜 걸인인가

1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by Napolia
​"본 연재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 종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작가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에세이임을 밝힙니다."


01. 육교 위의 모순, 누가 진짜 걸인인가

​'청춘(靑春)'이라는 단어가 멍 자국처럼 시퍼렇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젊음이 자산이라지만, 지갑이 텅 빈 젊음은 그저 형벌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지독한 가난과 동거 중이었다. 점심은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게 예사였고, 버스비 몇백 원이 아까워 웬만한 거리는 무조건 걸어 다녔다. 낭만적인 산책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행군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동전 몇 개가 손끝에 잡히질 않았다. 버스를 타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집까지는 세 정거장. 평소라면 거뜬할 거리였지만, 하루 종일 굶은 탓에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터덜터덜 걷는 내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초라해 보이던 오후였다.

​눈앞에 가파른 육교가 나타났다. 저 고개만 넘으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 육교 정상에 섰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기이하고도 잔인한 풍경과 마주했다.

​육교 한가운데, 한 걸인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의 행색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걸인의 전형이었다. 헝클어진 머리, 때 절은 옷가지, 바닥을 향해 푹 숙인 고개.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 남루한 행색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의 앞에는 구걸용 바구니나 찌그러진 깡통 대신, 빳빳하고 깨끗한 와이셔츠 상자 뚜껑이 정갈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광경은 마치 은행 창구의 현금 정리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푸르딩딩한 만 원짜리 지폐들과 천 원짜리 지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칼같이 정돈되어 있었다. 꼬깃꼬깃 구겨진 돈이 아니었다. 누군가 정성스럽게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했다. 지폐들 옆으로는 500원짜리와 100원짜리 동전들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수북하게 탑을 쌓고 있었다.

​나는 순간 걷는 것을 잊고 멍하니 그 '돈의 제단'을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대충 계산해 봐도 족히 5만 원, 아니 10만 원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웬만한 직장인의 며칠 치 일당이, 아니 나의 한 달 생활비에 육박하는 거금이 그 상자 뚜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위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허기를 느끼며 서 있는 내 주머니 속엔 먼지뿐이었다. 반면, 길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인 저 걸인의 상자는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쾅' 하고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누가 진짜 걸인인가.

​형식적으로는 바닥에 앉아 손을 벌리는 그가 걸인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자본의 크기로 보자면, 당장 밥 한 끼 사 먹을 돈이 없어 비틀거리는 내가 진짜 걸인이었다. 그는 '가난'을 연기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나는 '평범'을 연기하며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더욱 애처롭게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와이셔츠 상자 위, 그 가지런히 정돈된 지폐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젊은 놈이 사지 멀쩡해서 뭐 하냐? 네 주머니보다 내 상자 뚜껑이 더 따뜻한데."

​그의 '연출된 가난'은 나의 '진짜 가난'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사람들은 그의 연출된 비참함에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지만, 나의 진짜 궁핍함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저기 앉아 있다면 "젊은 놈이 일은 안 하고"라며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그 육교를 내려왔다. 배고픔 때문이 아니었다. 다리가 아파서도 아니었다. 세상이 내게 보여준 그 노골적인 아이러니, 가짜 눈물이 진짜 땀방울을 이겨먹는 그 더러운 현실이 너무나 서글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와이셔츠 상자 속의 가지런한 지폐들. 그 질서 정연한 풍요로움이, 내 인생의 무질서한 빈곤을 철저히 조롱하던 그날 오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가짜가 진짜의 뺨을 아주 세게 후려치기도 한다는 것을.


​[작가의 한마디]

​"차라리 그가 퇴근길엔 외제차를 타는 반전이 있기를... 그래야 내 진짜 가난이 덜 억울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