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겨울, 붉은색 온기
장수동의 겨울은 냄새로 먼저 찾아왔다. 매캐하고 쿰쿰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냄새. 바로 연탄 타는 냄새였다.
종점 상회 마당 한구석에는 검은 연탄이 탑처럼 쌓였고, 창문마다 두꺼운 비닐이 덧대어졌다. 논과 밭은 하얀 눈 이불을 덮고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겨울방학이 되자 나는 다시 장수동으로 내려왔다. 이번 방학의 목표는 거창했다. 바로 똥장군과의 '비밀 합숙'이었다.
"야, 오늘 우리 할머니 제사라 집이 북적거려서 잘 데가 없어. 너네 상회 사랑방 비지?" 똥장군이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뻔했다. 밤새 만화책을 보고 귤이나 까먹으며 놀자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허락(물론 똥장군이 장작 패기를 돕는 조건으로)을 받고 우리는 사랑방을 차지했다. 사랑방의 아랫목은 그야말로 '절절끓는' 지옥불이었다. 장판 색깔이 왜 누런색이 아니라 시커먼 색인지 알 수 있는 온도였다.
"으아, 뜨거! 야, 엉덩이 익겠다." 우리는 아랫목에 이불을 겹겹이 깔고, 윗목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추우면 아랫목으로 기어가는 걸 반복했다.
"야, 문틈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 옷 좀 끼워 넣어." 똥장군이 덜덜 떨며 말했다. 우리는 문풍지가 떨어진 문틈을 헌 옷가지로 꼼꼼하게 틀어막았다.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우리는 낄낄거리며 만화책을 보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내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빙글빙글 도는 꿈이었다. 똥장군이 옆에서 "야, 배 멀미 난다..."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나! 일어나! 이놈들아!"
누군가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천장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다.
"아이고, 이를 어째! 애 잡겠네!"
희미한 시야 사이로 할머니의 다급한 얼굴이 보였다. 평소의 그 냉철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나는 짐짝처럼 들려져 마당 평상으로 옮겨졌다.
"읍, 우욱..." 옆을 보니 똥장군도 나란히 널브러져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은 누런 호박처럼 팅팅 부어 있었다.
"비켜라! 이게 약이다!"
할머니가 양손에 대접을 들고 뛰어오셨다. 대접 안에는 살얼음이 동동 뜬, 맑은 국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동치미였다.
"마셔! 쭉 들이켜!"
할머니는 내 입에 대접을 들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국물을 받아 마셨다. '쨍-'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머리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톡 쏘는 탄산과 시큼하고 짭짤한 맛이 몽롱하던 뇌를 강타했다. 꽉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
"푸하-!"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똥장군도 "끄억-" 하고 트림을 하며 살아나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들자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차가운 새벽 공기. 하얗게 서리가 내린 장독대.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할머니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는 셋째 삼촌.
"이 미련한 놈들아. 문구멍을 아주 꽉 틀어막고 자니까 가스를 마시지." 셋째 삼촌이 혀를 찼다. 할머니는 빈 대접을 뺏으며 내 등짝을 스매싱했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똥장군 너는 왜 남의 집에 와서 객사할 뻔하냐!"
할머니의 손바닥은 매웠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매운 손맛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평상에 나란히 앉아 남은 동치미 무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입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살얼음 소리.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겨울 아침의 햇살.
"야, 설(서울)뜨기. 너 얼굴 진짜 못생겨졌다." 똥장군이 부어오른 내 얼굴을 보며 킬킬거렸다. "거울 봐라, 임마. 넌 호박 덩어리야."
우리는 서로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웃을 때마다 머리가 징징 울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죽다 살아난 놈들만이 알 수 있는, 그 아찔하고도 시원한 겨울의 맛이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