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9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저녁 약속 전 누나와 성수동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식당 웨이팅도 없었고, 가고 싶던 카페도 무난히 들어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책갈피를 발견해서 정말 만족스러운 하루다.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저녁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에게서 연락이 온 건 3월 초였다. 날이 따듯해지던, 나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던 그날.
내가 본인 스타일이라며 말을 걸던 그 사람은 키가 정말 컸고, 외투가 버거워 보일 정도로 말랐었다.
살짝 목이 늘어난 티에 항공 잠바를 입은, 회색 발목양말에 서류가방을 들던 모습.
냉소적인듯 창백한 웃음을 가진 사람. 재미는 없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고 빠르게 다음 약속을 정했다.
그는 서로의 집 중간에 위치한 건대입구에서의 저녁을 제안했다.
어쩐지 빚지고 싶지는 않고 딱 중간을 지키는, 참 정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없는 차분함을 가진 그를 잠깐 떠올렸다. 꾸밈에 관심이 없던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지 궁금했고,
유난히 운수가 좋던 날의 저녁을 기대했다. 약속 3시간 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 미안한데 오늘 안만나는게 좋을것 같아요.
연인으로써 감정은 안드는데 서로 시간 및 감정소비만 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일방적으로 연락드려 죄송해요... 좋은분 만나세요! >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나는 성수동의 일요일을 혼자 걸어야했다.
모든게 순조롭던 그날, 나는 차였다.
어쩐지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