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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스 Nov 21. 2024

언어장애 4급으로 판정합니다.

장애아 육아의 시작

또렷하게 써진 글자를 읽고 또 읽어본다. 벌써 열댓 번은 넘게 읽은 듯한데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다. 받아들여질까 싶어 또 읽지만 여전히 현실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언어장애 4급으로 판정합니다.


백일이 되기 전에 뒤집기 되집기를 자유자재로 하던 아이. 만 10개월에 걸음마를 했던 아이. 18개월에 30개 이상 단어를 내뱉던. 누구보다 발달이 빠르고 영리하던 내 아이 라노가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발달장애아가 되었다. 너무나도 어색하지만 선명하게 인쇄된 글자. '언어장애'이 네 글자가 가슴속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상처는 보이지 않지만 심장이 베인 듯 아려왔다.


라노를 장애아로 만든 건 나라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엄마로서 좀 더 신중했어야 한건 아니었냐는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 멈추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서 많은 검사를 했고 치료실에서 기록지를 받았다. 담당의 진단서까지 더해져 장애신청을 했다. 마치 내 자식을 장애아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엄마처럼 난 그 과정을 담담히 진행했고 결국 라노는 장애아가 되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오듯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누구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동굴 속에 가두기 시작했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곳에 숨어서 스스로의 고통에 갇혀버렸다.


이 종이 한 장으로 우리의 항해는 시작 되었다.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우편물을 꺼낼 때 스쳤던 스틸 우체통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손끝이 시렸다. 매일 지나치는 공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낯선 세상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우편물을 뜯는 순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 어지럽고 두려웠다. 집에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아 우편물을 뜯고는 한동안 손가락 하나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 난 내 의지로 발달이 늦은 내 아이를 국가에서 인정하는 장애아로 만들어 버렸다. 차가운 현실과 마주하면 정신이 번쩍 날 줄 알았는데. 링 위에서 현실과 마주하자마자 KO 패로 쓰러져버린 나약한 선수가 되었다. 내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무언가 답을 찾기 위해 나를 채찍질할 줄 알았건만.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나약한 존재였다.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처럼 그렇게 휘리릭 쓰러져서 일어날 수 없었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시간이 다가오는데 컨디션 회복이 안된다. 축 늘어진 풍선에 아무리 공기를 집어넣어도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이 주저앉고 말아 버리는. 아이 앞에서는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현관문을 열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세상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내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게 배달된 것은 고작 종이 한 장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종이 한 장으로 시작된 이 여정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왔다. 아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오늘 아침 유치원 등원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앞으로의 시간들을 이렇게 보낼 수만은 없는데 어찌해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원 차량에서 해맑게 내린 라노는 유치원에서 있던 스승의 날 행사에 대해 쫑알쫑알 얘기했다. 어제의 라노와 똑같은데 오늘부터 라노는 장애아라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는 어제와 다른 세상인데. 아이에게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놓인다.


나만 아프고 힘들면 되는 거야. 엄마가 널 지켜줄게.  


오늘만 충분히 슬퍼하고 내일은 나아질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3년 동안, 라노와 내가 함께 단단해질 것이다. 넘어지고 일어나며, 누구보다 강한 라노와 엄마가 되어 세상을 마주하리라.


2019년 5월 15일. 라노와 나는 그렇게 언어 장애아와 양육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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